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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③교래곶자왈과 북받친밧
오무룩한 경작지·움막터·숯가마… 화전 생활상 뚜렷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24. 10.17. 03:00:00
[한라일보] 화산섬 제주도의 독특한 지형인 곶자왈이 넓게 펼쳐진 중산간 마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이곳에는 곶자왈 지대에 첫 조성된 교래자연휴양림이 있다. 면적만 해도 2.3㎢에 이른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국마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형상(1653~1733) 목사가 남긴 기록화첩 '탐라순력도'에 '교래대렵(橋來大獵)' 장면이 있을 정도로 중요시됐던 사냥터이자 목장지대다. 사냥도 그냥 소소한 사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렵(大獵), 즉 교래리 주변 일대에서 행해진 큰 사냥이다.

드넓게 펼쳐진 교래곶좌왈 일대, 뒤에 보이는 오름이 지그리오름이다.



옛 국영목장 화전민 흔적 남아

역시 탐라순력도의 '산장구마(山場駒馬)'에는 객사 1동과 일반가옥 12동으로 이뤄진 교래리 마을이 등장한다. 산장은 산마장을 일컫는다. 산마장(山馬場)은 조천읍 남원읍 표선면을 중심으로 해발 400m 이상 지대에 조성됐다. 처음 이 일대에서 목장을 개척했던 김만일(1550~1632)의 사목장이 산마장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산마장은 18세기 후반에 침장, 상장, 녹산장으로 개편되었다.

교래리 지경은 침장(針場) 지역에 해당한다. 조선 초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한라산 목장(국마장)을 개축하면서 344호를 목장 밖으로 이주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 조성된 국영목장은 고려 말 목마장을 근간으로 해서 확장됐다. 그 과정에 목장 내에 있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문헌 기록에서처럼 마을 형성도 오래됐다. 교래리는 원래 이름이 도(ㄷ+아래아)리다. 도(ㄷ+아래아)리를 한자를 차용한 이름이 교래(橋來)다.

교래자연휴양림 내 남아있는 움막터.

교래리 일대에서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예전 국영목장이었던 휴양림 속 화전 경작 흔적과 생활상이다. 원래 중산간지대는 경작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국마를 기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중산간지대 목장에서 목장전과 화전 경작이 허용되었다. 이곳 교래휴양림에는 이러한 화전 경작과 숯굽기 흔적을 볼 수 있다.

휴양림 매표소에서 탐방로를 따라 600여m를 가다보면 돌로 축조한 움막터가 나타난다. 가로 세로 2.7×3.8m, 3평 정도 되는 면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담장 높이는 1.3m 정도, 내부에는 화덕을 놓았던 흔적도 남아있다. 움막터 주변은 3, 400여 평 정도 되는 오무룩한 평지다.

이곳 맞은편에는 비교적 너른 평탄지대가 있다. 원래 돌무더기가 많은 땅이었으나 경작을 위해 정리된 상태다. 면적은 대략 1000평 정도, 가운데는 돌을 치워 쌓아놓은 머들이 확인된다. 곶자왈 지대에 오무룩하고 평평한 곳을 골라 산전으로 이용했던 사례다.

움막터 바닥에서 확인한 화덕 자리.



안내문 등 제대로 관리 안돼

사람들은 곶자왈지대에서 따비 등을 이용해 돌을 일구고, 가시덤불을 태운 후 팥이나 피 같은 작물을 심었다. 이 일대 산전은 1940년대 중반까지 행해졌다고 한다.

숯가마는 탐방로를 따라가다보면 나타난다. 한곳은 거의 무너져 내렸고, 1.2㎞ 지점 숯가마는 비교적 양호하다. 교래곶자왈은 도내외 탐방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탐방객들을 위해 안내문 등을 설치했지만 글씨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데다, 숯가마터 역시 정비 관리가 안되면서 원형이 차츰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제주의 인문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최소한의 정비와 함께 관리에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움막터 주변에서 돌구조물을 조사하는 모습.

교래리 일대의 화전은 이곳만이 아니다. 감나무골, 뱀죽은물, 먹모르화전 등지에 살던 화전민들이 일구기 시작한 마을이 교래리다. 지금은 이덕구 산전으로 알려진 북받친밧도 있다.

북받친밧은 사려니숲길로 진입할 수 있다. 천미천의 두 지류가 Y자 형태로 나뉘어 섬처럼 고립된 지점을 말한다. 북받친밧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이는 화전 명칭에서 유래한다.

제주에서 화전 명칭은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다. '캐운밧', '남친밧', '불콘(ㅋ+아래아+ㄴ)밧', '친밧', '멀왓' 등으로 불렸다. 북받친밧 일대에서는 계단식 경작 흔적 등이 남아있다.

무성한 잡풀로 뒤덮인 숯가마.



4·3 비극의 상징 '북받친밧'

북받친밧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제주4·3사건 당시 주민들의 피난처 였다. 봉개, 용강, 회천, 도련 등지의 사람들이 피난했다. 북받친밧에는 용강 주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주민들이 원래 마을 등지로 돌아간 1949년 봄 이후 무장대 사령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다. 이덕구 산전으로 불리는 이유다. 북받친밧은 화전의 흔적과 함께 4·3 비극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화전이 성행했던 교래리 화전민들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다. 세금 징수를 담당했던 봉세관 강봉헌은 1899년 제주도내 화전민들에게 화전세 징수를 위한 자료인 '제주삼읍공토조사성책'을 작성했다. 여기에 교래 50인, 교래경(橋來境) 100인으로부터 화전세를 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영평이나 용강, 안좌(현재 가시리 일대) 등 다른 마을에 비해 그 수가 많다. 교래 일대 화전민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북받친밧(이덕구 산전) 일대에서 조사하고 있다.

진관훈 박사는 제주의 화전을 이제까지 조사 사례를 근거로 유래와 입지에 따라 공토형, 오무룩형, 목장밭형, 산전형으로 구분했다. 교래곶자왈 지대의 화전은 곶자왈이나 '드르'(들판)의 오무룩한 곳에 화입하여 개간한 뒤 화전 경작을 한 사례다. 북받친밧은 주로 산간에 있는 분지 형태의 지형을 이용한 산전형에 해당한다. 공토형(公土型)은 사장이나 향교전 등 공토를 임대하거나 허가받고 화입(火入)하여 개간한 뒤 농사를 짓는 화전을 말한다. 목장밭형은 제주지역의 가장 전형적인 화전으로 목장에 화입하여 개간한 뒤 농사 짓는 산장이다. 제주 지역 대부분 화전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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