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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무한한 원도심… 그 길 걷게 하고 싶어요"[당신삶]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 (27) '온천탕' 기억 지킨 박재완 씨
서귀포 정방동서 나고 자란 '온천탕 집 아이'
옛 목욕탕 기억에 변화 입혀 '치유' 공간으로
"모든 길 연결… 계속해 마을과 마을 이을 것"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입력 : 2024. 11.06. 17:00:27

모두의 기억을 품은 '온천탕'의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박재완 씨가 50년 넘게 그대로인 목욕탕 굴뚝을 배경으로 서 있다. 신비비안나 기자

[한라일보] 아직도 그때의 굴뚝이 남아 있다. 애초부터 목욕탕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듯이. 큰길이 나며 마을 골목골목은 변했어도 50년 넘게 그대로인 풍경이다. 그곳에 '온천탕 집 아이'가 있다. 이 건물에서 나고 자랐다는 박재완(50) 씨다. "평생을 (서귀포) 정방동에 살고 있다"는 그는 '모두의 목욕탕'의 기억을 지키며 마을 프로젝트를 잇고 있다.

|온천탕과 '원도심'

1971년 문을 열었다. 서귀포에서 세 번째로 생긴 목욕탕이다. 서울로 '유학' 갔다 내려온 재완 씨 아버지의 제안이었다. 어머니가 좀 더 힘들지 않게 일했으면 한다는 아들의 바람에 재완 씨 할머니는 국밥, 건어물 장사를 정리하고 목욕탕을 차렸다.

그렇게 지어진 3층짜리 건물에는 재완 씨 아버지의 손길이 닿아있다. 수학 교사였던 아버지는 디자인에 참여하며 네모반듯한 대신 곡선과 직선, 원형이 공존하는 어딘가 다른 목욕탕을 세상에 냈다. 그곳에서 재완 씨가 살았다.



동네에 큰 건물이 몇 안 됐던 당시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완 씨네 가족에겐 하루하루가 바쁜 삶의 공간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같이 손수 목욕탕을 열었고, 어머니와 고모는 지금의 커피숍과 같은 다방을 운영했다. 그 한편에는 어머니가 꾸린 의상실이 손님을 맞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모두가 3층에 있던 집으로 퇴근했다. 어린 시절에 제 이름보다 '온천탕 집 아이'로 불렸다는 재완 씨는 때때로 할머니를 도와 목욕탕을 청소하고 카운터를 보기도 했다.

"소위 떼돈 벌 정도로 잘됐다"는 목욕탕은 정방동의 화려했던 과거이기도 하다. "(동네에)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곳에 목욕탕이 다 있었다"며 "그만큼 동네에 정주 인구가 많았다는 증거"라고 재완 씨가 말했다. 지금에야 추자도, 우도 다음으로 제주에서 인구가 적은 곳이 정방동(지난 9월 기준 1343명)이지만 70년대 생인 그의 기억엔 가장 '핫한' 공간이었다.

"일단 사람이 정말 많았어요. 이 근처에 영화관이 3곳이나 있었거든요. '삼일극장'과 지금 서귀포극장이라고 하는 '아카데미극장', 그리고 명동로에 있는 '코아아트홀극장'까지 말이죠. 주거는 물론 금융, 학교, 문화예술에 유흥, 향락까지 모인 공간이었어요. 저는 그 시절을 관통해 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골목길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없어지고 저만 남은 거예요."

재완 씨는 낡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온천탕의 기억을 잇고 있다. 신비비안나 기자

|나 아닌 '모두의 목욕탕'

재완 씨와 함께 나이를 먹은 온천탕은 2016년 영업을 멈췄다. 그해 초까지 45년간 목욕탕을 운영해 왔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다. 이듬해 온천탕은 완전히 문을 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은 있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터였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뜻하지 않게 어머니 곁에서 감귤 농사를 짓게 되면서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흘렀다. 농민회, 청년회 활동을 하며 동네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찾아왔다. 암이었다. 2017년 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간의 사회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됐다. 열패감이 몰아치는 힘든 시기였지만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에 밟힌 것은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 가족, 나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이지만 모두의 공간이기도 했어요. '모두의 목욕탕'이었으니까요. 동네를 바꿔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이 건물에서 풀어보자', '여기에서 시작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내가 해 왔던 활동의 연장선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기로 했어요. 이전까지는 고민만 했다면 그 시기를 앞당기게 된 거죠."

'온천탕'에 새 옷을 입혀 복합문화공간을 운영 중인 박재완 씨. 신비비안나 기자

|'미래문화자산', 그리고 치유

그렇게 온천탕에서의 실험이 시작됐다. 낡은 건물을 허물어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항암 치료를 마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군산, 목포, 부산 등 전국의 재생 공간을 수없이 누볐다. 여러 방향성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재생 공간은 원형을 많이 유지하다 보니 낡음이 낡음으로 끝난 것 같았어요. 그래서 허름하고 버려진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로 했죠. 그게 시대에 맞는 정신이라고 생각했어요."

뜻이 맞는 팀을 찾게 되자 곧바로 공간 기획에 들어갔다. 2020년 하반기부터 2021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기까지 스무 번 넘게 회의를 하고 수정하면서 옛 목욕탕을 새롭게 해석해 냈다. 마침내 2022년 10월 1일에 문을 연 온천탕에는 '라바르'라는 새 이름과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기능이 덧입혀졌다. 카페, 갤러리, 편집숍 등이 한 데 모아진 모습으로 다시 손님을 맞고 있다.

세월의 주름 같던 '낡음'은 사라졌지만, 건물 곳곳에선 온천탕의 기억을 마주할 수 있다. 건물 뼈대와 틀이 고스란히 남은 데다 바다를 닮은 푸른 타일의 둥그런 여탕과 옛 남탕과 연결됐던 환풍구, 목욕탕 물을 책임지던 물통까지 원형 그대로여서다. 개인 건물로는 유일하게 2021년 '서귀포 미래문화자산'(3호)에 지정된 것은 옛 기억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높이 평가 받은 일이었다.

어린 시절, 그때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재완 씨가 말했다. "(목욕탕을 다녀갔던)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아이가 부모를 모시고 온 적도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친구들도 다녀갔고요. 그런 것처럼 이 공간의 큰 힘은 '기억'인 것 같아요. 나의 기억보다 모두의 기억이 더 많기 때문이죠."

옛 기억에 새 옷이 입혀졌지만 재완 씨가 말하는 이곳의 정체성은 여전히 '목욕탕'이다. 더는 몸을 씻는 곳은 아니지만, 그때처럼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몸 대신 마음을 씻는 공간이길 바란다. 그 이름을 제주어로 바다를 뜻하는 '바르'와 '씻다, 정화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라바레'에서 따온 것도 그래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작은 바다'가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난 2년간 갤러리의 전시 주제도 '치유'였다.

재완 씨가 옛 목욕탕을 재해석해 문을 연 문화복합공간 '라바르'에는 당시 여탕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신비비안나 기자

|공간에서 길로… "마을을 전시장으로"

재완 씨의 관심은 건축물이란 공간에서 땅 위에 나 있는 '길'로 옮겨 뻗고 있다. 여태 정방동 마을길의 변화를 지켜봐온 그에겐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지만, "불신이 컸다"고 했다.

"예전엔 도로가 확장되고 소방도로가 나면 마을이 발전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름다웠던 골목이 없어지고, 오히려 그곳에 있던 집들이 파괴됐죠. 사람들은 이주하게 됐고요. 그런데 다행인 건 제가 생각하는 길들이 아직 남아 있고 원도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을 따라 걷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라바르를 중심으로 지난해 '물길 따라 마을 마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사람들을 모아 서귀포 원도심 물길을 함께 걷고 드로잉과 사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올해는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기업에 선정되며 '예술로 도심 산책'을 운영하고 있다. 재완 씨가 직접 코스를 기획하고 안내하며 원도심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도심의 옛길과 현재의 길을 연결시키며 동네를 탐방하고 기록하게 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온천탕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한 공간을 넘어 마을로 향하고 있다. 올 하반기엔 '서귀동프로젝트' 단체를 결성해 '원도심에 대한 고찰과 재인식'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재완 씨가 내년도 주민참여 예산을 지원 받아 선보일 '원도심 아트페어'는 또 다른 행보다. 정방동 마을이 하나의 '전시장'이 된다.

"모든 길은 다 연결돼 있잖아요. 내년은 정방동이 주 무대가 되겠지만 하나의 동그라미 같은 마을을 계속 연결하며 고리를 만들고 싶어요. 정방동에서 중앙동, 송산동, 천지동 등으로 확장하면서 말이죠. 이제 시작이지만 한 번 재밌게 기획해 보고 싶죠. 앞으로 10년, 20년 후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거, 또 해야 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하지만 변하지 않을 것은 라바르와 마을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질 거라는 거예요."

취재·글=김지은 기자, 영상 촬영·편집=신비비안나 기자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당신삶)

수많은 삶은 오늘도 흐릅니다. 특별한 것 없어도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당신삶'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삶을 마주하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문을 열어 주세요. (담당자 이메일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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