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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어떻게 사랑이 그래서
임지현 기자 hijh529@ihalla.com
입력 : 2024. 11.25. 02:30:00

영화 '아노라'.

[한라일보] 살면서 우리는 때로 가벼운 선택과 무거운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삶의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기에 어떤 선택들은 그저 순간에 충실하게,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한 채 흘러가 머무르게 한다. 그렇게 몸을 흠뻑 적실만큼 어딘가로 빠진 다음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둥둥 떠있음에도 신기하게 다음은 이어진다. 그럴 땐 삶이 원래 이런 건가 싶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싶다. 문제는 흠뻑 젖어 부유하는 중에 번뜩 드는 찰나의 침범에서 시작된다. 내가 이제 와서 수영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선택은 내게 과연 가능한 걸까. 둥실 떠오른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순간 또 다른 다음이 시작된다. 그 또한 예기치 못한 삶의 급류다.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누구나 하고 언젠가 하게 되는 이 선택의 다음을 보고자 애쓰는 영화인 동시에 인생이 다음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 시간의 무게를 측정하는 영화다.

애니는 성 노동자다. 그녀는 밤새 랩댄스를 추는 댄서인 동시에 직접 영업을 뛰는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이다.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이 뛰어나고 주눅드는 법이 없는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러시아에서 온 부호인 손님 이반을 만난다. 이반 역시 젊고 아름다우며 재력이 뛰어나고 주늑들 일 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청년이다. 이반은 애니에게 한 눈에 반하고 돈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손 쉽게 산다. 애니 또한 뒤틀린 구석 없는 젊은 부호 이반과 가까워지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점점 더 애니를 소유하고 싶은 이반은 일주일 동안 애니의 몸과 시간을 사는 거래를 제안하고 애니는 이를 수락한다. 둘은 급속도로 밀착된 상태로 매일을 공유한다. 현란하고 황홀하며 방탕하고 통제할 이가 없는 시간들이 지나간다. 다음의 연속마다 도미노처럼 경쾌하지만 위험한 파열음이 생기지만 둘 모두 서로와 지금에 흠뻑 젖은 상태라 그저 젖어 있기로 한다. 약속된 일주일의 시간이 끝날 즈음 여행으로 찾은 라스베가스에서 이반은 애니에게 청혼한다. 둘 모두에게 이 결혼을 망설일 모종의 이유들이 있었지만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둘은 즉흥적인 결혼을 한다. 행운과 행복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렇게 자정이 되어도 끝나지 않고 다시 번쩍이는 토핑을 입는다.

‘아노라’의 초반 1시간은 숨 돌릴 틈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데 마치 한도 무제한의 신용 카드를 들고 1시간 동안 백화점 쇼핑의 찬스를 잡은 친구의 흥분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 현란함에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애니와 이반을 결코 안정적으로 묶어주지 못한다. 일을 그만두고 이반의 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애니에게 대부호인 이반의 가문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와 말한다. 니가 감히? 이반은 당연하다는 듯 저항하지 않고 애니를 보호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친다. 지금의 애니가 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반의 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애니가 이제 할 수 있는 선택이 있기나 한 걸까. 화려한 1막의 쇼가 끝난 뒤 애니는 자신이 기꺼이 빠져 들었던 물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토록 뜨겁던 애니라고 이 결빙의 상태에서 평온할 리 만무하다.

이 대환장의 난장판 상황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아노라’는 사랑의 감정이 삶의 어떤 틈에서 흘러 들고 빠져 나가는 지를 집요하게 살피는 영화이기도 하다. 애니의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가던 그 밤, 애니는 처음 만난 이반 가문의 하수인 이고르 덕에 아주 잠깐 씩의 안전을 허락 받는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찰나인데 묘하게도 찰나는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애니가 누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애니와 이고르의 잘 보이지도 않는 전진을 보는 관객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안도의 감정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그리고 모든 쇼의 막이 끝나갈 즈음, 어쩌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얻고 잃어버린 애니 곁에 이고르가 있다. 그는 귀한 분실품, 불 붙인 담배 한 대를 애니에게 건네고 애니의 본명인 아노라의 뜻을 묻는다. 지금까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을 묻는 이고르를 애니와 관객들은 빤히 쳐다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아노라’의 엔딩에는 눈이 내린다. 물에 흠뻑 젖었다가 시릴 정도로 차갑게 젖었던 아노라는 창 밖의 눈을 보고 이고르의 눈을 보며 자신에게 의아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이 남자에게 스스로를 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때의 애니는 무언가 많이 불편해 보인다. 능숙했던 몸보다 상처 받은 마음이 먼저 흔들릴 때를 만난 그 순간의 애니는 어쩌면 이고르가 어젯밤 알려줬던 내 이름의 뜻을 순간 떠올리지 않았을까. 완벽하게 망한 사랑과 완전하게 멍한 사랑이 뒤엉키는 찰나가 그렇게 지나갈 때 나는 울부짖는 게 아니라 울컥했던 아노라의 소리가 고요하게 내리는 저 눈을 뚫고 그녀의 다음을 스스로 호명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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