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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96)입구-릴케
오은지 기자 ejoh@ihalla.com
입력 : 2024. 12.17. 05:00:00
입구-릴케




[한라일보]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어느 날 저녁 당신의 집을 떠나

발을 옮겨 보십시오, 당신이 잘 아는 거길 떠나.

거대한 공간이 가까이 있습니다, 당신의 집은 그게 시작되는 데 있구요,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당신의 눈은 기울어진 입구에서 좀체

눈을 뗄 수 없음을 알겠지만, 당신의 눈으로

천천히, 천천히, 검은 나무 한 그루를

들어 올리십시오, 그게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도록: 바싹 마르고 외롭게.

그걸로 당신은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세계는 광대하고

말처럼 침묵 속에서 아직 자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그걸 잡으려는 순간,

당신의 눈은, 그 엷고 묘함을 느껴, 그걸 내버려 두게 될 것입니다.

삽화=배수연



누구든지 "잘 아는" 거기, 즉 당신이 집으로 삼고 있는 세계를 떠나면 광대한 세계를 만날 수 있어서 시인은 시작을 권한다. 여행담을 만들어 보라고. 어서. 길 어디쯤 기울어진 혹은 좀 비뚠 입구가 미완성인 채로 있을 테고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을 텐데, 하늘을 배경으로 바싹 마르고 외로운 나무, 한 그루 나무가 천천히 천천히 땋은 머리채 풀 듯이 만들어 가는 세계는 다르게 자라고 있으며 무성하고 무한히 뻗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의지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 누구의 소유도 아닌 것으로서 말 없는 침묵 속에 성숙해 가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순수한 공터이자 고양된 경지인데, 그만큼 드물지만 또 고정된 공간도 아닌 셈이다. 아마도 릴케가 도달하고 싶어 했던 궁극적인 경지는 알 수 없는 입구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들어 올려지는 나무 한 그루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장소엔 엷고 묘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그대로 외롭게 놔두면 되는, 말하자면 릴케에게 그곳은 곧 '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거기는 바깥이 아닌 자기 자신 속으로 발을 옮긴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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