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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오늘은 제주4·3이 일어난 지 77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험한 세월을 만나 목숨을 잃었거나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에게 우리는 무슨 말로 애도할 것인가. 1947년 3월부터 7년 7개월 동안 벌어진 제주4·3의 비극은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이다. 그때 벌어진 참상과 비극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3일 늦은 밤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 윤석열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제주4·3을 겪은 분들, 특히 환란 중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지난날 악몽이 되살아나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개명 천지에 날 벼락이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으니. 제주4·3이 발발하고 다섯 달여 후 해안으로부터 5㎞ 밖 중산간에는 계엄령에 따른 소개령(疏開令)이 발령됐다. 산사람들과의 접근을 끊기 위한 초토화작전의 시작이었다. 4·3의 대다수 희생자는 바로 이 기간에 발생했다. 계엄령은 1948년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였지만 초토화 작전은 이듬해 봄까지 석 달 동안 이어졌다. 해안으로 내려가길 포기한 2만 명가량의 주민들은 동굴이나 곶자왈에 가족 단위로 숨었다. 주민들은 추위와 굶주림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즉결심판이 더 두려웠다. 학살의 패턴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비슷했다.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죽였다. 그들은 학살 현장을 눈으로 봤고 소문으로 들었다. 이러한 끔찍한 장면들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자세히 묘사했다. 12·3 비상계엄 발령 일주일 후 제주지방법원 방선옥 판사는 계엄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계엄으로 재심 재판을 또 하려나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날은 방 판사가 4·3 당시 군사재판 희생자 30여 명에 대한 직권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4·3 비상계엄령은 무법(無法)이었고, 12·3 비상계엄령은 위법(違法)이기 때문이다. 초토화작전의 근거가 돼야 할 계엄법은 제주4·3 계엄령을 선포한 지 1년이 지난 1949년 11월 24일에서야 제정 공포됐다. 그리고 윤석열 내란의 12·3 비상계엄령은 국무회의 의결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 두 계엄령의 그림자에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 있다. 서청이 주축이었던 '특별중대'와 전직 정보사령관 노상훈이 계획했다는 '제2수사단'이 그것이다. 악랄하기 그지없던 서청 특별중대는 군번 없이 경비대나 민간복장을 했고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계급장도 없었다. 한편 내란이 성공했다면 노상훈의 제2수사단은 비선조직 활동을 하며 정치 테러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두 조직이 노리는 목표는 소위 빨갱이나 반국가 세력을 '절멸'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는 국가 또는 국가의 하수 조직들이 상대적으로 무력한 자들에게 행한 정치적 살해 행위다. 이것을 학살이라 부른다. 윤석열 내란사태에서 보듯이 법이 특정 정파와 특정인만을 위해 봉사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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