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13)겨울 숲

[황학주의 제주살이] (13)겨울 숲
  • 입력 : 2021. 12.07(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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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든다. 말 목장을 끼고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햇살이 부드러운데, 숲길은 내 마음의 군더더기들을 나뭇가지 위에 차례로 받아 걸면서 앞장을 서거나 나를 앞장세운다. 숲이란 말처럼 공동체의 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도 없으리라. 숲에선 대개 모든 생명체가 저절로 나고, 저마다의 존재감으로 살며, 숲속과 숲 밖이 다 어우러져 숲이다. 그리고 숲속에서 길러지는 온갖 생명들, 그것들의 왕성함 없이는 숲은 또 미완성이다. 굵은 소나무들 사이에 잎이 지거나 상록으로 엉겨있는 자잘한 나무들과 덩굴들은 서로의 발등에 발 뻗어보고 부딪치고 비켜주는 계통과 순서 속에 세상에 허투루 온 생명이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도 해준다. 수풀 속에 육질이 거의 메말라 버린 빨간 청미래덩굴 열매가 덩굴에 매달린 채로 겨울을 넘어가는 중이고, 인동덩굴은 푸른 잎들을 그대로 단 채 참나무 고목을 왼쪽으로 감고 올라가고 있다. 거기엔 서두름도 지름길도 있을 수가 없다.

겨울 숲의 차분한 생명감 속으로 뒷짐을 지고 걸어 들어간다. 모양새와 기울기와 빛깔, 그리고 맛과 냄새가 다른 나무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어떤 쓸쓸한 나무에 대해서 지나가는 새가 들려줄 때까지 당신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문득 나는 숲길에 드러난 돌 위에 손톱만 하게 고인 물을 바라본다. 한두 가지 정도의 미생물이 번식할 수 있을 만큼 그 물에 새가 배설물을 남기고 잎 부스러기가 떨어져 녹아 있다. 인간은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그렇게 작은 공동사회를 이룬 숲의 한켠에 짧은 겨울 오후 내 마음자리는 얹힌다. 거기엔 옅은 날갯짓 소리 같은 사소하고 매혹적인 팔랑거림들까지 들어 있다. 까치가 발 옮기는 소리가 있고, 나무 등껍질을 딛고 홀연 공중에서 내려오는 가랑잎 소리가 있다. 소리들은 보이는 곳에서도 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와서, 들리는 소리들과 들은 듯도 한 소리까지 바르르 살을 떨다 그 소리들을 닮은 내 안의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빠져나간다.

겨울 한 그루 나무 밑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단군은 신단수 아래서 홍익인간을 설했다 한다. 예수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이승의 삶을 다하고 부활의 주기로 건너가고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수줍은 자작나무 밑에서 내 사랑은 기다리고 있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면 동백나무 숲이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마을 초입이다. 마을 초입엔 당산나무가 서 있다. 당산나무는 그 한 그루로서 마을의 숲이다. 그처럼 한 그루 나무로서 누군가는 세상의 숲이 되기도 했다. 살아서 생명을 가지는 한, 아무리 작은 것도 함께 숲을 이루며, 누구든 스스로 작은 숲이다. 무수한 빈 통로와 빈 길까지, 그래서 숲을 본향으로 둔 것들의 리얼리티와 스토리는 오늘도 우리 주위에 현현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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