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익숙함과 낯섦

[이소영의 건강&생활] 익숙함과 낯섦
  • 입력 : 2024. 02.14(수)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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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학회에 참석하느라 여행 중이다. 여행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방문하는 설렘이 아닌 향수를 안고 왔다. 마침 이곳이 내가 수련한 대학 병원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수련의의 삶은 단순해서 주말도 없이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한동안 살았다고 해도 안 해 본 일도 많고 안 가 본 곳도 많다. 하지만 외래, 입원 병동, 응급실 당직을 수도 없이 하면서 이곳에 사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삶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시의 구석 구석이 친밀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이곳에 살던 무렵부터는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정체성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여행자로 이 곳에 다시 왔지만 이 도시 특유의 건물의 질감과 독특한 거리의 구조가 너무나 익숙해서, 낯섦 대신 내가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 카프그라스 증후군이라는 신경정신과적 증상이 있다. 배우자나 가족,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특이한 증상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배우자가 실은 그를 아주 닮은 낯선 사람이고 자신의 배우자는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많은 신경정신과적 문제들처럼 카프그라스 증후군 또한 뇌의 어디에서 왜 발생하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비교적 최근, 뇌의 기능적 연결성을 분석하는 연구를 통해 후두엽 피질이라는 뇌의 한 부분이 카프그라스 증후군에 강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후두엽 피질이 담당하는 기능 중의 하나는 익숙함을 인지하는 일이라고 한다. 즉, 시각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도 익숙함을 인지하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으면 내 가족의 얼굴을 보아도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 증상은 조현병 같은 질환에서도 볼 수 있지만 치매 같은 신경 퇴행 질환에서는 더 흔하게 본다. 이 증상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환자가 본인을 돌봐주는 가족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믿어서 돌봄을 거부 하거나, 진짜 가족이 어디 갔는지 걱정하고 불안해하거나, 가족을 찾아 나선다고 길을 잃거나 할 때다. 매우 드물지만 가짜 가족이 진짜 가족을 숨기거나 해쳤다고 믿고 공격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환자가 또 이상한 말을 한다고 흘려 넘기지 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익숙한 세상이 갑자기 낯선 사람들만으로 가득찬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서운 경험일까. 항정신병약제로 전반적인 망상의 치료를 기대해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치매 환자들에게는 항정신병약의 효과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뇌영상 연구를 통해 증상의 기전이 어느정도 밝혀졌기에 가까운 미래에 표적 치료의 길 또한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이소영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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