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26. 어음리 빌레못굴 학살터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26. 어음리 빌레못굴 학살터
무도한 토벌에 스러져간 죄없는 영혼들
  • 입력 : 2007. 11.06(화) 00:00
  • 이현숙 기자 hs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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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피난민을 무도하게 학살한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빌레못 굴 입구

현장에서 만난 사람
유일한 생존자/ 양태병씨
"임의 넋을 늘 생각"
난리때는 '산불근 해불근'
끄덕없는 피난지라 믿어
굴속에서 배고파 죽어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에 소재한 빌레못 동굴은 총 길이 1만1천7백49m로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며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억새의 흔들림과 돌담길을 돌고돌아 빌레못굴로 가는 길은 스산한 가을바람 때문인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4·3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목불인견의 참혹한 학살과 죽음의 비명이 환청처럼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4·3당시 주민들의 은신처이자 학살터인 이 굴은 천연 동굴로서의 유명세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굴 입구는 철문을 달아 잠궈 놓았다.

1948년 11월 15일쯤 제주주둔 국군 제9연대는 어음리에 소개령을 내리고 11월 18일 까지 3일에 걸쳐 소개가 마무리 된다. 이 기간에 마을은 전부 불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봉성과 곽지, 납읍, 애월 등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도피자 가족 등 많은 주민들은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에 숨어 지내다가 토벌대에 잡혀 죽어갔다. 해안 마을로 내려간다 해도, 중산간 마을 출신들은 폭도로 취급하여 마을 방위를 위한 보초에서 제외시키는 등 도피자 가족에 대한 총살도 다반사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어음리 등 중산간 도피자 가족들은 생존을 위한 피신처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납읍리 현씨 성을 가진 지관이 말하기를 "난리 때는 산불근 해불근(山不近 海不近) 하라든가, 빌레못굴은 30명이 능히 숨어 살 수 있는 곳이다." 라는 정감록에 따라 빌레못굴에 피신처를 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빌레못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피바람 몰아치는 광란의 시절만 넘기면 좋은 세상 만나 헤어진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 수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들은 어음리, 납읍리, 장전리에서 모여들었는데,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곳을 30년쯤은 끄떡없는 피난지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굴은 찾지 못하리라 믿었던 이들의 꿈은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의 수색작전에 들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전날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습격당하자, 군경토벌대와 애월지역 민보단이 본격적인 보복작전에 나선 것이다.

빌레못굴은 굴입구가 좁아 쉽게 찾을 수 없었으나, 토벌대는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굴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을 보고 찾아낸 것이다.

애월지서 경찰과 원동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군인들의 주축이된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있던 어린아이들, 죄없는 여자들, 힘없는 노인들을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무도하게 학살을 자행하고 만 것이다.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 있던 강규남의 가족(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과 송제영, 강성수, 양신하, 양승진, 양세옥 등 29명을 굴 입구 근처에서 학살했다. 당시 강규남의 누이는 처녀였는데, 토벌대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오빠 살려주세요" 라고 애원을 해도 토벌대는 바로 총을 쏘아 죽이는 비정함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희생자는 주로 어음, 납읍, 장전 사람들로, 시신처리는 강규남이 산에 피해 있다가 가족들이 학살된 사실을 알고 임시로 시신에 흙을 덮어두었다가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수습했다.

빌레못굴에서의 학살은 슬픈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토벌대는 이 날 아주 영특하고 고운 남자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이는 포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민보단으로 참가했던 김병두(79, 어음리) 할아버지는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척후병으로 경찰 하나하고, 우리 민보단 열사람 하고 앞에 갔지. 나머지는 좀 떨어져서 막 군대들 모양으로 따라오고. 굴앞에 가니까 김이 팡팡팡 올라왔지. 경찰부대가 탁 진을 쳤어. 여기 확실히 폭도들 있다며 다 포위하라고 했어. 제일 먼저 나보고 들어가라고 했어. 하이고, 무서워서. 경찰은 들어가지도 않고. 나 보고만 들어가라고 했어. 나 혼자 그때 들어간. 이것저것 보지도 못하고 들어 가자마자 톡 앉아버렸어. 한참 있으니까 애기 우는 소리가 난 거야. 이렇게 해서 들켜버린 거지. 그리곤 밖으로 끌어내 다 죽여 버린 거지"

한편 이날 토벌대가 굴안으로 진입하자 굴 깊숙한 곳 까지 들어 갔던 양재인과 여섯 살 짜리 딸 강숙자, 그리고 납읍리의 현원학과 그의 아들은 캄캄한 굴속에서 길을 잃고 배고파 죽었다. 굴속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죽은 시신들은 지난 70년대 초반 영남대 빌레못굴 탐사반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시신들은 유족들에게 인도되었다.

강규남의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제주의료원에서 수습을 했으며, 당시 유골과 고무신, 허리띠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9일, 제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의 강경 진압작전은 이 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07년 4월 7일, 4·3당시 빌레못 굴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을 진혼하는 해원상생굿이 열린 바 있으며, 지금 그 자리엔 해원방사탑이 쓸쓸히 서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양태병(80·사진) 할아버지는 4·3당시 빌레못 굴에 숨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다. 이 사건에 대해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귀중한 분이다.

그는 토벌대가 진입할 당시, 굴 안 돌틈에 단단히 숨어 죽음의 화를 면했던 것이다.

"저는 소개를 피해 납읍을 거쳐 애월리로 갔습니다. 제가 그 때 18세쯤 될 때니까 그 연령에 다 보초를 세우는데 저는 보초를 안 세워요. '너는 산군으로 분류되니까 보초를 못 세우게 됐다.' 는 말을 들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였죠. 어머니에게 도망간다는 말을 남기고 빌레못굴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30명 인원에서 29명이 죽었습니다. 토벌대는 굴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죽였어요. 젊은 사람은 없고 다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이고, 단순한 피난생활이었는데. 사람들을 다 죽이고 굴 입구는 완전히 봉했습니다. 그 때 두어살 난 어린아이 하나를 발목을 잡고 빙빙 돌리다가 담벼락에 내리쳐 죽인 끔찍한 이야기는 주변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굴 안에는 저 혼자 있었어요. 3일 쯤 지난 후였는데 굴 안에 부인과 자식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인과 자식을 찾으려고 돌을 치우고 들어왔어요. 그 덕분에 저는 살았습니다. 돌을 치웠던 사람은 육지형무소 가서 죽고, 부인과 자식도 굴 안에서 죽었습니다."

<오승국 4·3연구소 이사>※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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