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7. 동광리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7. 동광리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폐허의 마을에 댓잎만 서걱이네
  • 입력 : 2008. 02.19(화) 00:00
  • 이현숙 기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폐허의 옛길을 걷는다. 무등이왓 대숲에서 서걱이는 댓잎소리가 중음을 헤메는 원혼들의 비명소리 처럼 들려와 두려움을 느낀다.

마을을 포근히 감싸안은 거린오름과 원물오름, 그리고 멀리 도너리오름과 병오름 등으로 둘러 쌓인 동광리는 안덕면의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4·3으로 인한 동광리의 인명피해는 엄청났으며, 마을의 구조와 위치까지도 새롭게 바뀌어졌다.

이처럼 동광 마을에는 폐허의 마을 옛터와 시신이 없는 헛묘, 피신처였던 큰넓궤 등 4·3이 남기고 간 유적 등이 많이 남아 있어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동광리는 4·3 당시 140여 가호(무등이왓 80여호, 삼밭구석 40여호, 조수궤 10여호, 간장리 10여호)에 살던 주민들 중에서 200여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이루어 지면서 마을은 거의 전소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4·3 이후 동광리는 동광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간장리에 마을이 복구되어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조수궤 등의 마을은 사라져 버렸다.

대토벌과 마을 소각

이 마을에서 주민 희생의 시작은 1948년 11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군인토벌대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강신학(姜辛鶴·60), 김을돌(金乙乭·58), 강군봉(姜君鳳·52), 고만석(高萬石· 52), 고윤재(高允才·49), 고군욱(高君旭·47), 고재언(高在彦·44), 이임길(李壬吉·35) 등 10여명을 강귀봉 댁 우영팟에서 총살한 것이다. 이날 간장리 마을의 10여호의 집도 군인들에 의해 불 태워 졌다.

11월 21일에는 '무등이왓'과 '삼밭구석'이 전부 소개되었다.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동광리주민들은 마을 근처에 숨어지냈다. 삼밭구석 사람들은 마을 서북쪽에 있는 큰넓궤 주변으로 피신했다.

동광리 주민들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더라도 좀더 안전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도너리오름 곶자왈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나중에 큰넓궤를 발견하게 되고, 폭설이 쏟아지자 이 굴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큰넓궤는 험한 대신 넓었고, 주민들이 숨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후 이 굴로 찾아든 주민들은 120여명이나 되었다.

연이은 주민 희생

모슬포 주둔 국군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 3대대(대대장 이철원 대위) 토벌대들은 동광마을 소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주민들은 무조건 학살했다. 특히 1948년 12월 12일과 13일에 있었던 '잠복학살'은 토벌대의 비인간적인 패륜적인 만행으로 주민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잠복학살' 이란 토벌대가 주민들 일부를 학살하고, 학살된 시신들을 거두러 오는 유족들을 숨어있다가 다시 학살하는 사건을 말한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주민들이 모여들자, 무등이왓 대나무 밭에 숨어 기다리던 토벌대가 나타났다. 주민들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토벌대는 그들을 한 곳에 모여 앉히고는 그 주위에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질렀다. 생화장을 시킨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하여 꼬꾸라졌고, 어른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아 보려고 바둥거리다 죽어갔다. 널려진 빨래처럼 시체들이 이곳에 하난 저곳에 하난 흩어진 채 쓰러져 죽은 모습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잔인한 학살에 대한 분노보다도 언젠가는 자신들도 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때문에 더욱 꽁꽁 숨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노약자가 대부분이었으며, 강춘화 할머니는 가족 친지 열 한명을 잃었다.

볼레오름으로 피신

50여일 동안 피신해 있었던 큰넓궤가 토벌대에 발각된 후 동광리 주민들은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다. 토벌대는 피난민들의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올라왔다. 토벌대는 눈 덮인 한라산을 누비며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볼레오름 근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동광리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감산리 등지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49년 1월경 거의 붙잡혔다. 토벌대는 붙잡힌 주민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일시 수용했다가, 옥석을 가리지도 않고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했다. 그 중에는 동광리 주민들이 가장 많았다.

그 후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안마을인 화순리나 사계리 등지에서 5년간 힘든 소개생활을 하다가 1954년 경 마을을 재건하게 된다.

동광리 주민들은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10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소개를 화순으로 내려갔는데 가서 보니까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니랐수다. 우린 밖에 잘 나다니지 못하니까 소식으로만 들었는데, 전날에 총소리가 팡팡 나서 그 다음날에 들어보면은, 오늘은 스물 아홉명이 죽었져, 뭐했져, 매일….그 때는 아기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잔뜩 먹으라. 내일되면 죽어질지도 모를 일" 이라며 하루 하루가 죽음의 공포속에서 살았던 해안 마을에서의 소개 시절을 김원유(여·80) 할머니는 회상한다.

사라진 마을

무등이왓과 삼밭구석은 4·3 당시에는 동광리의 가장 큰 중심마을이었다. 그러나 4·3 이후 마을 재건과정에서 가장 아래 마을인 간장리에 마을이 재건되다보니 이 두마을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것이다.

무등이왓은 300여 년 전에 설촌된 마을로 주민들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무등이왓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 는 데서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시기인 1939년, 무등이왓에는 2년제인 동광간이학교가 건립됐는데 이 학교는 감산리에 있었던 안덕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이어서 창천, 서광, 덕수, 상천 등지에서는 물론 중문면 색달리의 학생들이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4·3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진취적이었던 이 마을을 영원히 앗아가 버렸다. 또한 초토화작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던 무등이왓 주민들도 강력한 토벌로 인해 쓰러져 갔다.

현재 마을터에는 제주도에서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 만이 남아 찾아오는 이를 맞이하고 있다.

무등이왓은 마을 규모가 컸던 만큼 피해도 큰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대나무 숲과 팽나무들이 남아 당시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활쏜동산 초입에는 4·3으로 완전히 멸문한 양씨의 가족묘지도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동광리 하동인 삼밭구석은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밭구석이라고 이름 붙여진 마을이다. 4·3당시 46가호의 주민들이 거주하던 마을로 임씨 집성촌이었다.

삼밭구석 옛터에는 마을터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나무들이 밭 구석 곳곳에 자라고 있다. 현재 이 마을 입구에는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세운 4·3사건 위령비가 서 있다.

그러나 위령비를 지키는 350년 된 거목 팽나무가 태풍에 잘려나가 아쉬움을 준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2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