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잃어가는 공모전에
통합목표 내건 서예가들
'아름다운 뜻' 성사 되나
"국전(國展)이나 도전(道展) 입선이 별게 아니다. 그 심사가 과연 타당했느냐 함은 그 막후를 살펴볼 때 미묘한 것이다. 세인들은 누가 입선하고 낙선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입국(入國)하여 걸어만 줘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심사를 맡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빈축하기도 하였으나 나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당락을 바라지 말고 오직 출품으로 자기공부의 기회를 삼으라."
해방 이후 절대 권위를 가졌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이 국전 입상에 바동거리는 현실을 두고 한마디 했던 모양이다. 1983년에 나온 제주소묵회 창립 10주년 기념회지를 뒤적이다 보니 소암의 그같은 '어록'이 보인다.
국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에도 민간에서 숱한 공모전이 생겨났다. 뜨고지는 게 아니라 한번 태어나면 사그라지지 않는 것처럼 4백개에 이른다는 경향 각지의 공모전은 질긴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제주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예총의 제주도미술대전 서예 부문 공모를 비롯해 서예협회제주도지회, 서가협회제주도지회,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 제주도서예학회, 추사체연구회제주도지회가 매년 전국 규모나 도내 공모전을 열고 있다. 오죽하면 제주섬의 웬만한 서예가는 무슨무슨 공모전 초대 작가라는 말을 할까 싶다.
어느 중진 서예가는 작정한 듯 '공모전의 악순환'에 대해 말했다. 이런 식이다. 서예로 먹고 살려면 공모전 수상 경력이 필요하다. 큰상일수록 좋다. 그래야 수강생들이 몰려든다. 이번엔 제자들 차례다. 지도자 체면이 서려면 수강생들도 공모전에서 입상해야 한다. 입상을 위한 줄서기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전국 공모때 도외 참가를 늘리기 위해 다른 지역 서예단체에 출품을 '부탁'할 경우엔 이런 말까지 나온단다. "그러면 우리 단체 회원에게 대상을 내주라." 이쯤되면 자기공부하는 공모전은 없다.
반듯한 심사를 위해 애쓰는 서예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도내 적지 않은 공모전은 '끼리끼리'다. A단체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이면 B단체 회원들은 출품을 꺼린다. 주관 단체에서 제 식구 챙기느라 낙선할 게 뻔한 데 출품을 하겠는가.
지난 16일부터 시작된 제주도서예·문인화총연합회전을 찾았다. 제주 서단 화합과 공모전 통합을 목표로 출범한 연합회의 세번째 전시였다. 공모전 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이 들리던 차에 전시 참가자가 예년보다 크게 줄어 내심 걱정스러웠다. 연합회의 임원은 "공모전 통합이 성사되지 않으면 도민 앞에 공개사과하고 물러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제주도 서예계를 하나로 뭉치고자 아름다운 뜻을 모은'이 지역 서예가들이 한국 서단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