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는 '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과 들은 물론 바다까지도 돌밭이었다. 경작을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불필요한 돌을 캐내어 쌓아둬야 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경작지. 강경민기자
돌의 나라 제주… 농업활동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
삼재(三災)의 섬 기후적 특성에 대비한 생활 불가피
제주는 화산섬이다. 수백만년전 바다에서 솟았다는 거대한 땅덩이에는 제주의 탄생에서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이 깊이 새겨져 있다. 섬 어디를 가나 마주하는 화산활동의 흔적은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경관을 형성하며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화산섬은 달리 말해 '돌의 나라'다.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꺼풀 벗기면 제주인의 삶의 애환을 마주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돌무더기가 널린 땅을 어렵사리 일구며 이어온 삶. 살아가기 위해선 섬 전체를 뒤흔드는 바람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척박한 땅, 화산섬 제주
제주도는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신생대 제4기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신생대 제3기 말 용암이 바다에서 분출되기 시작해 제4기 동안 화산활동이 계속됐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제주도의 형성과정은 다섯 차례의 화산 분출기로 구분되며, 모두 79회 이상에 달하는 용암분출이 관찰됐다.
특히 제주 지질을 이루는 암석 중에 가장 넓게 분포해 있는 현무암의 분출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 졌다. 신생대 3기에 분출한 조면암이 원래의 기반인 화강암을 덮고, 그 후 다시 제4기에 현무암이 분출돼 그 위를 덮음으로써 이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차례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섬은 산과 들은 물론 바다까지도 돌밭이었다. 화산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뿌리내리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17세기에 김상헌이 쓴 '남사록'의 풍물편에는 힘겹게 농토를 일구며 살아가는 제주인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백성은 곤궁한 자가 많다.―이 땅에는 바위와 돌이 많고 흙이 덮인 것이 몇 치에 불과하다. 흙의 성질은 부박하고 건조하며 밭을 개간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달리게 해서 밟아줘야만 한다.―내가 밭가는 자를 보니 농기구가 매우 높고 작아 마치 아이들 장난감 같아 물으니 대답하기를 "흙속에 몇 치만 들어가도 모두 바위와 돌이니 그래서 깊이 밭을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농업활동의 어려움은 제주 토양의 특성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제주의 토양은 70% 이상이 화산활동 시에 뿜어져 나온 화산쇄설물과 무석, 화산재 등으로 구성된 화산회토다. 겉흙 층이 얇고, 크고 작은 돌들이 많이 섞여 있으며 조금만 파내려 가도 암반이 나오는 게 특징이다. 씨를 뿌리기 위해선 땅을 일궈야 했으니 돌 처리가 농업활동의 큰 걸림돌이었을 거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옛말에 제주를 삼재(三災)의 섬으로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산 높고 골 깊으니 물의 재앙이요, 돌 많고 땅이 부박하니 가뭄의 재앙이요, 사방이 큰 바다 되니 바람이 재앙이다.' 제주섬은 연중 바람이 불고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다. 농작물의 성장을 저해하는 초속 10m 이상의 폭풍일수가 110여일로 많은 편이며 8~9월에 집중되는 태풍으로 농업재해가 빈번히 발생한다. 제주의 기후적 특성에 대비한 생활이 부득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제주는 삼재(三災)의 섬으로 불릴 만큼 사람이 살기에 척박한 환경이었다. 돌 많고 바람 강한 화산섬에서 농업활동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진=한라일보 DB
▶거친 환경 이겨낸 삶의 지혜
화산섬에서 살아가기 위해 제주사람들은 돌담을 쌓아왔다. 거친 환경에 맞서 싸우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온 것이다. 도 전역을 가로지르는 밭담에는 섬이라는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얽히고설켜있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1234년 제주판관 김구가 토지 경계를 두고 다툼이 잦아지자 경계용 돌담을 쌓도록 했다고 하지만 밭담은 그 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의 농업활동은 그보다 훨씬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돌을 골라내는 과정이 필수였는데 이에 따라 자연스레 밭담이 형성됐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생활상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바뀌는 시기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돌을 골라내기 시작한 것을 돌담의 시초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라며 "전부터 이뤄지던 것을 김구 판관이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경작을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불필요한 돌을 캐내어 쌓아둬야 했다. 돌담 이전의 양식인 '머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읽힌다. 밭의 구석진 곳이나, 커다란 돌이나 암반이 있어 밭을 갈기에 적합지 않은 곳에 돌을 쌓아 잡석을 제거했던 사례는 지금도 쉽게 발견된다.
김종석 씨는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전통사회의 돌문화'에서 "과거에서부터 경작과정에서 많은 양의 돌이 발생했을 것이고 이를 도로작업, 경계용으로 쓰고, 그러고도 남은 것은 백켓담으로, 또는 경작지 활용에 방해되는 경우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처리됐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밭담을 쌓는 일은 섬의 기후적인 특성과도 밀접히 연결된다. 바람이 강한 지역이면서 여름철 태풍의 길목인 제주에서는 강한 바람에 대비한 생활과 농경방식이 필요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거뜬한 제주밭담에는 땀 흘려 가꾼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강성기 월랑초 교사는 "제주는 완만한 형태의 화산섬으로 대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기표기복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반도 다른 지역보다 강한 바람에 대비한 생활을 하기 위해 밭담을 쌓았을 것"이라며 "바람이 강한 해안가 지역의 경우 3m에 가까운 높이의 밭담이 발견되는 것을 봤을 때, 애초에 밭의 경계를 구분 짓던 밭담의 기능이 방풍 역할로 확대됐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강시영·강경민·김지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