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을 찾지 못한 이들과 떠나기 아쉬워 걸음을 늦추는 이들이 머물고 있는 산지천 여인숙 골목. 사진=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산지천 복개 당시 지역 경제 거점 발돋움골목에 사창가 형성되며 우범지대 비난도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는 적막했다. 골목을 여러 번 돌아도 마주치는 사람이 몇 안 됐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이 남았다. 갈 곳을 찾지 못한 이들도, 떠나기 아쉬워 걸음을 늦추는 이들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다. 산지천 서쪽 여인숙 골목 이야기다.
새 주소로 하면 관덕로 7길과 중앙로 1길이 만나는 곳. 이 골목에는 언뜻 봐도 오래돼 보이는 여인숙 건물이 모여 있다. 산지천을 중심으로 탐라문화광장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 모습은 조만간 사라질 풍경이 됐다. 이곳의 건물들이 헐리면 산책로, 허브정원, 주민체육시설 등이 들어서는 산짓물공원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탐라문화광장 조감도.
#낮과 밤이 없는 거리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은 낮과 밤이 없는 거리였다. 1966년 산지천 복개 구조물 위로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면서 골목도 덩달아 사람들로 붐볐다. 열 평 남짓한 작은 가게까지 호황을 누렸다.
보흥슈퍼 막내딸 고은경(32)씨. 고씨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도 골목의 옛 모습이 남아있다. "어릴 때지만 동네 친구들과 뛰놀던 곳이라 기억이 생생하다"는 고씨는 "복개 건물에 살던 선주들이 뱃일을 나갈 때면 담배, 라면, 술을 몇 박스 씩 단체로 주문했다. 한 달에 한 번 대량으로 구입을 했기 때문에 박스 채로 포장돼 있는 상품들이 가게에 가득했다"고 말했다.
▲보흥슈퍼.
'현준엄마'라는 60대 여성도 '사람 소리'가 가득하던 당시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40년 가까이 이 골목에 살고 있다.
"낮이든 저녁이든 사람소리로 시끄럽던 곳이었어. 지금 서부두 수협어판장 부근으로 배가 들어오면 선원들이 다들 이 골목에 있는 다방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거나 갈빗집에 가서 고기를 먹곤 했지. 요즘처럼 PC방, 게임장 등 오락거리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철거됐지만 산지천 서쪽으로 441갈비, 황금갈비처럼 갈비집이 몰려있었고 영춘빵집 같은 유명한 찐빵집도 있었던 때야."
#뱃사람들의 희로애락 흐르네
옆으로는 산지천을, 아래로는 서부두를 이웃한 이곳에는 바다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제 이 골목에 살던 사람도 많았다. 이들 중에는 물 건너온 이들도 꽤 됐다. 골목에서 만난 위성철(57·사진)씨와 이모(64)씨도 30~40년 전에 제주에 들어와 바다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둘 다 이곳에 정착해 머구리배를 탔던 기억을 풀어냈다.
부산 경남에서 스무 살 초반에 제주에 들어왔다는 이씨는 1970년대 초부터 23년간 '머구리'로 일했다고 한다. 머구리는 물속에 들어가 일을 하는 잠수부다. '잠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일본어 모구리의 변형된 말로 제주에서는 잠수를 전문으로 물질하는 남자를 머구리라고 불렀다.
"그때 잡은 소라는 일본에 수출했고, 전복과 해삼은 국내에 판매했지. 운이 좋게도 처음 배워서 하는 것치곤 어획물이 많았어. 웃돈을 주고 데려가려는 선주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씨의 말처럼 그 당시 머구리는 많은 보수와 대우를 받으며 여기저기서 모셔가는 인력이었다. 그러나 깊은 바닷속에서 공기통에 의지한 채 일하는 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옛 기억을 되살리는 위성철씨.
이제는 사라진 일 '머구리'는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이씨는 나이가 들어 뱃일을 그만 뒀고 사는 곳도 옮겼다. 하지만 지금도 이 골목을 자주 찾는다.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주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두 쪽이니까 선원, 선주들이 많이 살았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꽤 남아있고. 그런데 지금은 육지에서 흘러 들어와 여인숙을 빌려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토박이가 떠난 곳
"이곳엔 토박이가 없다."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다. 상권이 침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남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온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이다. 여인숙에는 대부분 세를 얻어서 사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다. 이곳에 20~30년 살아온 사람들은 이곳을 '아가씨 골목'이라고 불렀다. 과거 사창가가 형성되면서 흘러온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 골목이 예전부터 '아가씨 동네'야. 그래서 주변에 미용실이 많았어. 가게들마다 손님들도 많았고. 지금은 혼자 운영하지만 당시에는 종업원이 5명이나 됐지. 오전 다섯시 반에 문을 열고 할 정도였으니까." 골목 인근에서 30년간 보경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오옥숙(58)씨가 말했다.
골목에 사창가가 들어서면서 우범지대로 비난 받기도 했지만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일터지자 삶의 터전이었다. "이 골목이 아가씨 골목이라 인식이 안 좋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춘기 때는 이곳에 산다고 얘기를 잘 안하더라. 그래도 아이들이 비뚤지 않고 착하게 잘 자랐다"고 오씨는 덧붙였다.
#사람 소리 가득하던 골목을 추억하다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새롭게 변할 거리에 대한 기대를 품는 사람들은 낙후된 모습을 지우기 위해서는 개발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 한편에는 익숙한 골목이 사라지는데 아쉬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설 전후로 해서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는 현준엄마의 말이다. "남들은 '산지'라고 하면 아가씨 골목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보기도 했지. 그런데 여기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떠났지만 아직도 서로 나누는 문화가 남아 있어. 예전에는 생선을 사서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지. 다른 데 가서도 여기만큼 정을 붙일 수 있을까 걱정이야."
▲사람 소리 가득했던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