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우의 한라칼럼] 자연스러움에 대한 그리움

[송창우의 한라칼럼] 자연스러움에 대한 그리움
  • 입력 : 2018. 04.10(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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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한 겨울 비워두었던 공간에서 끊임 없이 채워가는 시간이다. 목련과 벚나무가 꽃을 피우더니 어느새 도로는 꽃눈이 오가는 차량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그 자리엔 파란 싹들이 솟아났다. 파란 개불알풀과 자주 빛 광대나물이 작은 꽃을 피웠고 작약과 도라지며 환삼덩굴 할 것 없이 온갖 풀들이 싹을 올리자 무당벌레가 찾아들었다. 주변에는 벌들이 잉잉거리며 맴돈다. 강남 갖던 제비가 다시 찾아왔고, 까투리를 홀리는 장끼의 사랑을 찾는 소리로 황량했던 도시와 대지는 한층 풍성해졌으며 시끄러워졌다.

봄이 왔는데도 지난하고 추웠던 겨울을 견디지 못해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후손을 남기고 사라진 것들도 있고, 단지 꽃이나 벌이나 새나 딱정벌레라는 이름으로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도 있을 것이다. 1년을 살지 못하는 풀과 벌레들도, 이보다 오래 사는 동물과 식물들도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번성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은 가시와 독성물질을 뿜으며, 약한 동물도 새끼를 많이 낳아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워 짧게는 수천 년, 길게는 수백만 년을 버텨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느 하나 독립적으로 살아오지 못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야 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생존의 점점 공간이 좁아지고 사라지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진화했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저급한 본능, 탐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을 살지 못하는 풀과 벌레에서부터 볼레낭(보리수나무)과 멩게낭(청미래덩굴), 찔레, 팽나무와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는 곶자왈도, 심지어 농사를 짓던 땅도 투기의 대상으로 변해 파헤쳐지고 있다. 아무런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밤이면 노루가 찾아들고, 버려진 고양이와 개들이 숨어 있던 들쥐와 벌레를 잡아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하는 삶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곳까지 도로가 개설되고 타운하우스와 커다란 시설물들이 들어서자 움직일 수 없는 풀은 물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된 나무는 꼼짝없이 사라졌다. 동물들은 쫓겨나 도로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오가는 차량에 치어죽기 일쑤고 일부는 주택가로 나와 사람들을 놀래게 한다. 그래놓고 건물 공터에 나무 몇 그루를 심어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방식이 약간 다를 수는 있으나 거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필요가 충족되면 욕구가 사라지는 자연스러움과 동떨어져도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될 수도 없고 충족되지도 않는데 있다. 수십, 수백 년 된 숲과 수십 만 년 바위와 조그만 굴, 괘도 단지 며칠, 몇 달이면 완벽하게 평지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장비로 무장해 문화재나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을 계속 파헤칠 것이라는데 있다.

인간은 손과 발, 눈과 코, 신장과 심장, 간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다. 이런 장기들은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숨을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 시시한 것이 없다. 어느 한 부분이 약해지면 고통을 받고 그렇다고 어느 한 부분이 강해졌다고 해서 전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새와 벌, 벌레와 나무와 풀이 모두가 필요한 존재이듯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이들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마음으로 자연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머리로는 분명했었는데 글로 쓰니 왜 이리 추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송창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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