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당시 왜구가 상륙했던 제주시 화북포구.
[한라일보] 지금으로부터 약 470년 전인 1555년(명종 10) 6월 왜선 40척에 1000여 명의 왜구가 제주를 침략했다. 이른바 제주 을묘왜변의 발생이다.
이들은 동년 5월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다가, 퇴각하던 중 제주를 재차 침략했다. 왜구들은 화북포로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제주성으로 진격해 성을 포위했다. 산지천 서안에 있던 제주성 동성을 중심으로 3일간의 접전이 벌어졌다. 제주의 군민(軍民)은 방어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기습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 실상을 전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555년(명종 10) 6월 28일: 제주목사 김수문이 급히 장계를 올리기를 "이달 21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甫吉島)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습니다"라고 했다.
▷1555년(명종 10) 7월 6일: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를 올렸다. "6월 27일, 무려 1000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했으며,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로위 김직손(金直孫), 갑사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재차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한 왜군 장수가 자신의 활 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金夢根)이 그를 쏘아 무너뜨렸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했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을묘왜변의 제주 대첩에 대해 ‘명종실록’은 이처럼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상륙한 왜적들이 진을 친 곳으로 김수문 제주목사가 날랜 군사 70여 명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곧이어 김직손, 김성조 등 4명의 치마돌격(馳馬突擊)이 왜적을 무너뜨렸고, 김몽근이 적장을 쏘아죽임으로써 왜적은 퇴각했다. 승세를 잡은 아군이 왜적을 추격하며 다수를 참획했다. 이처럼 ‘명종실록’에서는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에 대해 평민과 일반 군인의 이름까지 거명하며 그들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이전에도 왜구의 침략 및 노략질은 수시로 있었다. 을묘왜변 직전인 1552년(명종 7) 5월, 이른바 천미포왜변이 있었다. 왜구가 정의현 천미포에 상륙해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한라산으로 피신했다가 몰래 어선을 탈취해 도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과 정의현감 김인(金仁)은 방비에 힘쓰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해 유배형을 받았다.
1555년 6월 왜구 1000여명 침략 제주성 포위군민 협력으로 치열한 공방 끝 격퇴 역사적 의미
한편 조선 건국 이래 왜구의 제주 침탈을 ‘조선왕조실록’과 ‘탐라기년’(김석익)에서 찾아보니 1401년(태종 1)부터 1555년 을묘왜변까지 약 30회에 이르렀다. 태종 때까지는 수십 척의 왜선이 침입했으며, 그들의 침입 범위는 곽지, 고내, 명월, 죽도, 조공천, 우포, 차귀 등 주로 북쪽 해안 일대였다. 하지만 세종부터 명종까지는 왜선 1~4척으로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침입 범위는 대정현, 천미포 등 남쪽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해안가에 상륙해 민가를 소실하고 노략질을 자행하거나, 진상선을 약탈했다. 다시 말해 조선 건국 이래 을묘왜변 직전까지 왜구의 제주 침범은 단순한 약탈에 그쳤다. 제주를 점령하고, 제주를 그들의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 계획적으로 침범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하면 제주 을묘왜변은 이전의 왜구 침략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왜선 40척에 1000여 명의 왜구가 침략해 이전보다는 대규모의 침략이었다. 또한 그들은 해안가 약탈이 아니라, 제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방전을 펼쳤다. 따라서 이를 물리친 을묘왜변의 제주 대첩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을묘왜변의 실상을 면밀히 조사해, 기존의 판단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앞의 ‘명종실록’에 의하면 왜구가 처음 상륙한 곳과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을묘왜변이 종료된 지 10여 년 뒤에 쓴 황우헌(黃祐獻)의 ‘운주당 기문’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왜구들은 침범해 성을 포위했으며, 높은 능선(高陵)에 웅크리고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접근했고, 화살과 돌을 뒤섞어 쏘아댔다"라고 기록했다. 즉 왜구는 제주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높은 능선'에 진을 쳤고, 동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성의 동성은 퇴축(退築)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산지천 서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특히 성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당시 제주성 동문은 1780년(정조 4) 김영수(金永綬) 목사 때 축조된 간성(間城)의 남문(소민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왜구들이 진을 쳤던 '높은 능선'은 오늘날 제주기상대가 위치한 산지천 하류 쪽이 아닌, 당시 제주성 동문이 내려다보이는 남수각 동쪽 일대로 판단된다. 바로 이곳에서 제주 군민과 왜구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사실은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1556년 여름)에 "제주 사람 김성조(金成祖)가 왜변을 당해 남수구(南水口)에서 적을 패배시켜 건공장군(建功將軍)을 상 주었다"라는 기록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수구가 곧 오늘날 남수각으로 불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탐라기년’(1555년 6월)에는 을묘왜변 당시 왜구가 상륙했던 곳도 기록으로 남겼다. 즉 왜구는 화북포로 침범해 제주성을 3일 동안 포위했다고 전한다. 왜적들이 화북포로 상륙했다는 대목은 ‘탐라기년’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 대목은 중요한 사실이므로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화북포는 조선 전기에는 수전소 조차 설치되지 않은 포구였다.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제주의 방어시설로 방호소 13개소, 수전소 12개소를 적시하고 있다. 방호소 13개소는 제주목 5개소(조천관, 김녕포, 도근천, 애월포, 명월포), 정의현 3개소(대수산, 서귀포, 오소포), 대정현 5개소(차귀, 동해, 색포, 모슬포, 범질포)이다. 또한 수전소 12개소는 제주목 7개소(건입포, 조천관, 김녕포, 벌랑포, 도근천, 애월포, 명월포), 정의현 2개소(오소포, 서귀포), 대정현 3개소(모슬포中, 색포東, 범질포西)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화북포에 방호소 또는 수전소가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북포가 관문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최부(崔溥)의 ‘표해록’에 처음 등장한다. 최부는 1487년(성종 18) 9월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왔다가, 이듬해 정월 부친상의 비보를 듣고 제주를 떠난다. 1488년(성종 19) 윤1월 3일 별도포(화북포)에서 출발했고, 해상에서 표류해 중국 강남까지 갔다가 육로로 대륙을 종단하며 귀환해 7월 서울에 도착했다. 따라서 최부가 제주를 떠날 때의 장소는 별도포였으며, 이곳에서 후풍(候風)하다가 떠났다고 전한다.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