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일자리 선택은 사치?… "일할 권리 찾을 수 있길"

[기획] 일자리 선택은 사치?… "일할 권리 찾을 수 있길"
[발달장애, 그 보통의 삶] ⑤ 우리도 일할 수 있다
제주 공공형 장애인 일자리 89% '복지일자리'
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 절반이 '세탁업' 쏠림
"권리중심 일자리 늘리고 다양한 욕구 반영을"
  • 입력 : 2022. 09.07(수) 14:43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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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노동'. 지난해 11월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을 실현하기 위한 '권리중심 공공 일자리 취업박람회' 개막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이러한 글자가 적힌 띠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한라일보] '동료지원가'. 발달장애인인 노세종(37)씨와 한민지(30)씨가 건넨 명함에는 이런 직무가 적혀 있었다. 세종씨는 지난 2019년부터, 민지씨는 올해 3월부터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다. 동료지원가는 고용노동부의 '중증장애인 지역 맞춤형 취업지원' 사업이다. 현재 전국 14개 시·도에서 시행 중인데, 제주에선 제주도장애인부모회가 운영을 맡고 있다. 세종씨와 민지씨의 사무 공간도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장애인부모회에 마련돼 있다.

|발달장애인 잇는 '동료지원가'… "함께 모여 소통"

이들의 근무는 평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된다. 낮 12시까지 하루 3시간 근로지원인의 도움을 받아 일하고 있다. 현재 일하지 않거나 실업 상태에 있는 중증장애인을 지원하는 일을 맡는다. 자신과 같은 발달장애인이 취업할 수 있도록 상담하거나 자조모임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중증장애인의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데 맞춰져 있지만 또 다른 의미도 크다. 발달장애인이 함께 모이고 만나 소통하는 다리가 된다는 것이다. 제주도장애인부모회 강경균(제주시장애인전환서비스지원센터장) 사무처장은 "(동료지원가 활동이) 실제 취업으로 연계되긴 어렵지만 발달장애인이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조직해 권익을 옹호하고 여가 문화 활동을 함께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는 의미도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하며 부가가치를 생산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발달장애인이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며 "이들의 노동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동료지원가와 같은 발달장애인 특성에 맞는 권리중심 공공 일자리가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는 노세종(37, 오른쪽)씨와 한민지(30)씨가 제주도장애인부모회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김지은기자

|정신적 장애에 더 좁은 취업문… 발달장애인 고용률 '28%'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노동권도 '장애'가 있으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지체장애처럼 몸이 불편한 것보다 지적·자폐성 등 정신적 장애가 있으면 취업 문턱이 더 높아진다. 고용노동부의 '2021 장애인 통계'를 보면 전국 15세 이상 장애인 인구의 고용률은 34.6%였지만, 지적·자폐성 발달장애인의 고용률은 이보다 낮은 28%였다. 지체장애인(42.8%), 시각장애인(39.7%), 시각 외 감각장애인(청각·언어장애, 32.2%)의 고용률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

일하는 장애인 중 발달장애인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제주특별자치도의 장애인 일자리 사업(공공형 장애인 일자리) 현황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자치도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도내 장애인은 1134명인데, 이 중 발달장애인은 7.14%(지적 80명, 자폐성 1명)에 그쳤다. 다른 장애 유형을 보면 지체장애인 40%(454명), 청각장애인 21.5%(244명), 시각장애인 16%(181명) 등이었다.

|중증장애인은 취업 시장 '배제'… "권리중심 공공 일자리 늘려야"

정도가 심한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실상 일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들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권리중심의 공공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자치도의 공공형 장애인 일자리는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의 공공형 일자리에 참여하는 장애인의 89.2%(1011명)가 환경 정비, 주차구역 단속 등을 맡는 '복지일자리'로 일하고 있다. 나머지는 읍면동과 사회복지기관, 단체 등의 행정 도우미인 '일반형일자리'(8.5%, 96명)와 '요양보호사 보조일자리'(1.2%, 14명) 등으로 근무 중이다.

서울시의 사례가 제주에 시사하는 점은 크다. 서울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2020년부터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장애인 공공 일자리로 3988명을 채용 목표하고 있는데, 이 중 350명을 권리중심 공공 일자리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7월 말까지 실제 채용 인원은 346명이며, 이 중 절반가량인 170명이 '발달장애인'이다.

이들은 장애인 권익옹호, 문화예술, 인식개선 등 세 가지 직무에서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선택해 일하고 있다. 서울시 장애인자립지원과 김지선 주무관은 "장애인 권익옹호는 (장애인 차별 해소 등을 위한) 거리 퍼포먼스나 자립생활 홍보에 대한 일을 맡고 문화예술은 미술이나 연극, 행위예술 등을 포함한다"며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일도 한 가지 직무"라고 했다. 적은 일자리 수 등의 한계도 있지만 장애인 특성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 취업 시장에서 배제된 중증장애인까지 껴안는 시도라는 점은 분명 긍정적이다.

발달장애인 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이동우(21) 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장애인 일자리 특정 업종 '쏠림'… "다양한 욕구 반영을"

공공 일자리를 넘어 민간 영역에서도 장애인 일자리를 다양화하는 것은 과제다. 장애인의 욕구에 맞는 일자리가 전제돼야 발달장애인처럼 장애 정도와 특성이 큰 차이를 보이는 구직자의 경제활동을 늘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장애인을 다수 채용하는 '장애인표준사업장'(상시근로자 중 30% 이상)만 봐도 특정 업종에 쏠림이 심하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주지사에 따르면 제주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은 24곳인데, 이 중 절반인 12곳이 '세탁업'이다. 나머지 8곳은 '제조포장업', 그 외는 '기타 서비스업'으로 분류된다. 발달장애인의 다양한 욕구에 맞는 일자리를 연계하기 어려운 구조다.

발달장애인 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이동우씨의 엄마 김윤정(50)씨는 "동우 또래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박스 접기나 단순직을 많이 한다"며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속상한 마음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지역을 보면 장애 작가들이 기업과 협력해 소속 작가로 활동하거나 그림을 그려 상품으로 발전시키고 판매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며 "제주에서도 이러한 일이 시작되면 필요에 따라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업재활시설 늘려 일자리 확대?… "특화된 사업 있어야"

일부에선 경쟁 고용 시장으로 나서기 어려운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시설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직업재활시설은 '보호 고용' 형태로 중증장애인도 지속적인 훈련을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업체와 고용 인원이 제한적이어서 진입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자치도에 따르면 도내 직업재활시설은 10곳(제주시 7곳, 서귀포시 3곳)으로 올해 1월 기준 396명이 일을 하거나 교육생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자리를 위해 직업재활시설을 만드는 것은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담보할 수 없어 신중히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엔 직업재활시설도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아야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시에 있는 직업재활시설 '일배움터' 오영순 대표는 "직업재활시설은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면서 "제주는 시장이 작기 때문에 기존 시설의 사업과 중복되지 않아야 일자리가 지속 가능할 수 있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특화된 사업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제주지사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 내에 실제 호텔 객실처럼 꾸며진 발달장애인 직업 체험 공간. 김지은기자



맞춤 직무로 채용 연계… 일자리 지속성 확보 숙제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에 가 보니
직업체험·훈련에 취업 지원 등 담당
지역 특성에 맞는 직무로 채용 확대
취업자 '1년 또는 2년 계약직' 많아


온갖 물건과 계산대가 갖춰진 편의점부터 마트, 옷가게, 호텔 객실, 도서관, 카페까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제주지사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에는 이 모든 곳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 체험' 공간이다. 사회 진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성인 발달장애인은 실제 사업장과 똑같이 만들어진 이곳에서 사무 행정 보조, 숙박 서비스, 의류 분류, 바리스타 등 다양한 일을 배우고 있다.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는 지난 2020년 온라인으로 먼저 문을 열었다. 크게는 직업 체험과 직업 훈련, 취업 지원을 맡고 있다. 교육을 마친 뒤 취업으로 연결되는 직업 훈련에는 지난해 발달장애인 40명(연간 정원)이 참여해 37명이 취업했다. 올해는 지난 8월 기준 훈련 수료생 33명 중 32명이 취업을 마친 상태다.

이지혜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장은 "발달장애의 특성을 고려하면 장기적인 반복 훈련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분들이 훈련에 참여하고 있어 6개월간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며 "취업처가 나올 때마다 이에 맞는 훈련생에게 알선해 평균 3~4개월의 훈련을 거치면 일자리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제주지사 제주발달장애인훈련센터에서 발달장애인들이 바리스타 직업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장애인고용공단제주지사 제공



제주지역 특성에 맞는 발달장애인 직무를 제안하며 채용을 늘리는 시도도 잇고 있다. 이 센터장은 "발달장애인 고용 경험이 없는 도내 기업이나 지자체, 공공기관에 지속적으로 직무를 제안하고 채용을 늘려가고 있다"며 "올해는 롯데관광개발 드림타워 복합리조트에 고용이 시작된 것이 고무적인 사례"라고 했다. 드림타워에는 호텔집기류, 어메니티 등을 담당하는 '호텔 웰컴 패키지 관리원'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이 직무로 취업한 장애인과 10월부터 근무하는 인원을 합치면 모두 20명이 채용됐다. 이 중 절반인 10명이 발달장애인이다.

이 센터장은 "호텔 월켐 패키지 관리원을 비롯해 도내 학교에서 소독업무를 맡는 '우리학교 클린마스터', 도서관 내 도서를 소독하는 '도서항균관리원'처럼 직무를 보다 구체화해 제안하고 있다"며 "발달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채용자들도 받아들이기 쉽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일자리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은 과제로 남는다. 현재 센터를 통해 취업한 발달장애인의 37.7%가 지자체, 교육청, 공공기관, 병원 등의 '사무보조'로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의무고용률을 채우기 위한 '1년 또는 2년 이내 계약직'이다. 이 센터장은 "지난해 제주대병원에 계약직으로 들어간 수료생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례도 있다"며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당장 정규직이 어렵다고 해도 계약직으로라도 채용의 기회가 늘어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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