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심장 멈춘 아버지, 그 후 10년의 삶이 가능했던 건…

[심층] 심장 멈춘 아버지, 그 후 10년의 삶이 가능했던 건…
“CPR 도와달라는 요청에도 무서워 도망”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자책 섞인 ‘고백’
제주도내 민간인 첫 하트세이버 김지효씨
“실제 상황서 CPR 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제주도내 교육 기관 적어… 기회 늘려야
  • 입력 : 2022. 11.10(목) 17:08
  •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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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 핼러윈을 맞이해 인파가 몰리면서 사고가 발생, 시민들이 119 구조대원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라일보] 멀리 떨어져 사진으로만 본 현장이었는데도 말이 안 나왔습니다. 이미 숨을 거둔 사람들의 시신이 채 옮겨지지 못해 차디찬 도로에 놓여있고, 겨우 남은 삶의 불씨가 꺼질세라 부상자를 태운 구급 침대가 분주히 좁은 거리를 오갔습니다. 지난달 29일 핼러윈 축제로 뜨겁던 서울 도심 이태원 한복판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 사망자 156명, 부상자 198명(중상 33명). 참사가 남긴 아픔은 이러한 숫자로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처참한 현장에서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습니다. 부족한 소방관, 의료진 등 구급 인력을 도와 시민들도 구조에 뛰어들었습니다. 서로 짓눌려 숨을 못 쉬는 사람들을 힘 모아 끌어내고 심폐소생술(CPR)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처절한 사투였습니다.

"심폐소생술을 도와달라는 요청에도 너무 무서워 집으로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던 것 같다."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살아남은 게 죄가 아닌데도 당시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지금, 당장 이태원 참사와 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진다면 우리는 구조에 뛰어들 수 있을까요. 지금 들려줄 이야기가 우리에게 괜찮다는 격려와 함께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 연합뉴스

|10년 전 아버지의 심장마비… 제주 첫 민간인 ‘하트세이버’ 이야기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얼굴이 이미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정말 돌아가셨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자연스레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김지효(30) 씨는 결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들인 지효 씨에게 "학교에 갈 때 깨워주겠다"고 말하고 잠자리에 든 아버지였습니다. 새벽 3시쯤. 어머니가 크게 부르는 소리에 깨어난 지효 씨는 여전히 꿈인 줄 알았습니다. 갑작스레 심장마비가 온 아버지는 숨을 쉬지 않았고, 낯빛도 파랗게 변해 있었습니다. 지효 씨는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에게 '119로 신고하라'고 말하고는 바로 심폐소생술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농담’처럼 하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에겐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이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열심히 봤던 한 의학 드라마였지요. 매회 빠지지 않고 나왔던 심폐소생술을 유심히 봤기 때문이었을까요. 그 순간 몸이 움직여졌습니다. 혹시 두렵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지효 씨는 "그런 생각을 했으면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심폐소생술에 대해서 배운 적은 있었어요. 그런데 이론 교육만 받고, 더미(실습용 마네킹)를 가지고 실습을 해 본 적은 없었죠. 제가 아버지에게 CPR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에서 자주 본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마음에도 할 수 있었죠."

지효 씨의 심폐소생술은 119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계속 됐습니다. 동생도 번갈아 가면서 CPR을 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싣고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를 뒤따랐던 지효 씨는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운전대를 잡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힘들었던 10여 분이었지요.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 핼러윈을 맞이해 인파가 몰리면서 사고가 발생, 시민들이 119 구조대원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버지는 기적 같이 살아났습니다. 병원으로 옮긴 뒤 3개월 만에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깨어난 이후에도 약 1년간은 병원에 더 있어야 했지만, 뇌 기능도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의료진은 "아들 때문에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기까지 1년이 걸렸어요. 퇴원을 한 뒤에도 시계를 못 보시고, 의자 그림을 보고 '의자'라고 말하지 못하셨죠. 그때 제가 CPR을 하지 않았더라면 뇌 기능이 안 돌아왔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버지를 살린 지효 씨에겐 제주도내 첫 민간인 '하트세이버'(Heart Saver)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2012년 11월 제주도소방방재본부(현 제주도소방안전본부)는 지효씨를 도내 민간인 최초의 하트세이버로 선정하고 인증서를 수여했습니다. 하트세이버는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를 이용해 인명을 구한 사람을 뜻합니다.

지효 씨에겐 최근 이태원 참사가 남일 같이 않습니다. 현장에서 구조인력을 도와 심폐소생술을 하던 시민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봤다는 그는 "CPR 교육을 받아도 실제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거라고 본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무턱대고 CPR을 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해요. (혹시 잘못될까봐 무섭거나 두렵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저 역시 못 했을 거예요. 눈앞에서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당황하지 않고 바로 CPR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CPR에 대해 많이 노출시키는 게 필요할 겁니다."

심폐소생술을 배우는 사람들. 연합뉴스

|민간인 하트세이버 늘고 있지만… 도내 교육 기관 적어

지효 씨를 시작으로 제주에서도 민간인 하트세이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 10월말 기준 도내 일반인 하트세이버는 227명입니다. 도내 소방대원(의무소방원 포함) 하트세이버를 포함하면 그 수가 1170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급성심장정지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구급대원이나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에게 심폐소생술을 받는 비율은 전국적으로 낮습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그 비율은 2020년 기준 26.8%에 그쳤습니다. 심정지 환자 100명 중 약 27명만이 구조 인력이 출동하기 전에 심폐소생술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관련 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나 실생활에서 언제든지 CPR을 할 수 있으려면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폐소생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최근 이태원 참사 이후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제주에서도 관련 교육 문의가 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문제는 도내에는 관련 교육 기관이 적다는 겁니다. 도내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CPR 교육을 진행하는 곳은 제주도소방안전본부와 서귀포학생문화원, 대한적십자사제주도지사 3곳에 그칩니다. 제주대학교병원과 제주한라대학교, 제주관광대학교, 탐라교육원도 정식 교육기관으로 지정돼 있지만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도내에 CPR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심폐소생술을 배우는 아이들. 연합뉴스

그렇다면 심폐소생술, 왜 중요할까요. 제주도소방안전본부 소방교육대 송부홍 소방위는 "심정지 환자에게 최초로 해야 하는 응급처치"라고 말했습니다. 심정지 4~6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해야 환자의 소생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송 소방위는 "심정지 즉시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으면 뇌 손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며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해 열심히 소생을 시킨다고 해도 차후에 병원에 입원해 돌아가시거나 회복을 한다고 해도 최소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중요성을 알고 있어도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나서는 건 쉽지 않습니다. 혹시나 심정지 환자가 잘못되지는 않을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하는 두려움도 한 요인이지요. 송 소방위는 "심정지 환자를 발견하는 즉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지만 많은 분들이 CPR을 하기 꺼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는 선의로 행한 응급조치에 한해서는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 있다. (혹시 심정지 환자를 발견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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