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비밀은 없어
  • 입력 : 2023. 04.07(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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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복순'.

[한라일보] '길복순'의 세상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 곳이다. 자신을 사랑하거나 혹은 타인을 자신만큼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사실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보다 나을 리 없지 않겠냐는 전언, 사랑을 숨기거나 사랑에 진실하지 못한 것 또한 사랑이 아니라는 일갈. '길복순'은 '불한당'의 변성현 감독과 '무뢰한'의 전도연 배우가 만나 기어이 '진짜 사랑'을 감별해 내는 이야기다. 나쁜 놈들과 비겁한 놈들, 돈과 사랑에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고민하는 에이스 킬러 길복순은 자신의 직업이 딸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중이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것에 비하면"이라는 극 중 대사처럼 하나뿐인 딸 재영을 키우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다. 일에서는 대적할 사람이 없는 베테랑인 복순이지만 매일이 다른 딸을 대하는 엄마로서는 비기도 묘안도 없다. 그러니까 '방 문을 닫는 시기'에 접어든 재영은 닫힌 방 문안에서도 꽁꽁 숨겨놓은 무언가를 가장 가까운 사람인 엄마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복순이 사람 죽이는 직업을 가진 것이 비밀이라면 재영은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비밀이다. '길복순'은 이 두 사람이 각자의 비밀을 털어놓기까지 그리고 그 비밀이 만든 벽을 허물기까지의 과정을 중요하게 담고 있는 영화다. 복순과 재영 모녀는 스스로의 열심과 진심과는 상관없이 세상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비껴 난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이 그들이 약점이 되고 비밀이 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세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영화의 숨이 가빠진다.

'길복순'은 보는 이의 시야에 황홀경을 선사하는 매끈한 액션 영화다. 킬러 길복순이 된 배우 전도연의 액션 장면들이 관객들을 여러 차례 사로잡는다. 극 초반 특별 출연한 배우 황정민과의 대결을 시작으로 까마득한 후배인 김영지 역할의 배우 이연과의 승부, 다양한 킬러들이 모인 식당에서의 결투 장면, 극 후반부를 장식하는, MK 엔터의 대표 차민규 역할을 맡은 배우 설경구와의 일 대 일 대결 장면 등 다채로운 액션 장면들이 화려한 영상으로 선보여진다. 그리고 이 모든 액션 장면들은 또한 길복순의 업무이자 생존의 현장들이기도 하다. 길복순은 킬러가 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진심을 보여준 후배를 지키기 위해 죽을 고비가 눈앞에 있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잘하는 일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을 지키는 일, 길복순에게 킬러라는 불안한 직업은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극단적일 정도로 성비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킬러들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라선 여성 직업인 길복순에게 생활인 길복순의 가치관은 때론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이 된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무사고 능력자에게 일어난 사고는 그의 약점과 정확히 대치되는데 '교육적으로 좋은 살인은 없을까'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길복순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지령에서 그는 스스로 실패를 택한다. 그가 택한 실패는 또한 엄마로서의 길복순이 놓치지 말아야 했을 성공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엄마들의 세상과 밀려날 수 없는 킬러들의 세상이라는 양 극단을 오가며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길복순의 고뇌가 그의 칼 끝에 서린다. 자주 짜릿하고 때론 아름답기까지 한 '길복순'의 액션 장면들에서 배우 전도연의 눈은 항상 아득하다. 이 한 판의 승부가 인생의 많은 것들을 뒤흔들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의 눈빛은 자신만만하면서도 불안하고 또렷하게 상대를 응시하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너머를 보고 있는 듯하다.

자신이 한 선택만큼이나 불안한 선택을 하게 된 재영에게 엄마 복순은 말한다.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숨기고 살아야 하냐"고. 결국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 모녀는 그 비밀이 서로의 약점이 아님을 알게 되고 둘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게 된다. '길복순'은 액션 영화인 동시에 가족 영화이고 성장 영화이며 여성 영화다. 킬러인 엄마와 동성애자인 딸이 스스로의 존엄을 잃지 않는 해피엔딩의 영화이기도 하다. 비밀이 약점이 되는 시대에 '길복순'은 약자의 손에 가장 날카로운 칼을 쥐어준다.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야 할 것들이 하물며 고함을 치는 세상 위에 똑바로 선 모녀는 결국 가장 자신 다운, 서로를 위한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이제 비밀도, 약점도, 벽도 사라졌다. '길복순'의 가장 통쾌한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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