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돌담 너머에서 언제나 푸근히 웃어주던 이웃집 후박나무가 얼마 전 댕강 잘려나갔다. 땅 주인은 그 밭에 비닐하우스를 지을 거라고 한다. 아름드리 후박나무는 돌담에 바싹 붙어 있어 농사에 방해될 것 같지 않았고 주위 풍경과도 조화로웠는데…. 보고 있자니 속이 쓰리고 휑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나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보다 돈의 가치가 앞섰나 보다. 어쩌면 흔해 빠진 후박나무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밤에는 별을 이고 달을 걸치며 낮에는 돌담 곁에 오소록한 그늘 만들던 그 어여쁨을 모르다니.
살다 보면 돈이나 권력 혹은 편의를 얻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접하기도 한다.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을 쓰지만 사실 그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이루는 데 집중되어 있고 자신을 빛나게 하려 타인을 이용한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른 한편으로, 타자를 목적으로만 대하는 것은 가능한가?
삶은 생존과 안전이라는 일차적 욕구, 타인의 사랑과 인정이라는 관계적 욕구 그리고 유한한 삶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초월적 욕구가 어우러져 지어진 집이다. 이러한 욕구 중 앞의 두 가지는 "내가 먼저, 내가 더"의 비교 우위를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혼자서는 외롭고 약하기에 친구나 내 편을 만들려 한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이고 선택에는 반드시 선택되지 않음이 공존하기에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모든 타인의 가치는 동등할 수 없다. 그러면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불편한, 미운 타인은 수단으로 대해도 좋은 것인가?
존재의 조건이 관계이고, 존재가 곧 관계이며, 관계란 비록 체감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연결이다. 그러니 타자 없이는 나도 없다.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듯 인간은 개인이자 관계의 일부이다. 나 홀로에서 가족, 친구, 국가, 동·식물, 지구, 우주, 죽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어느 범위로 인식하느냐가 삶의 폭과 깊이를 결정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욕구의 지배를 벗어나 초월적 욕구만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서로에게 목적이자 수단으로 살아간다. 실현 가능한 차원은 초월적 욕구의 밝은 조명 아래서 생존·안전에의 욕구와 관계적 욕구를 성찰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많은 선각자들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는 알아차림과 실행이다.
그래서 나를 좋아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이용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그 관계를 멈춘다. 그다음,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돌본다. 나를 정당화하느라 그를 악마화하지는 않는다. 애쓴 나를 축복한다. 여력이 되어 마음이 내켜지면 그도 축복한다.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강한 관계의 사람들을 향한다. 최근 아시안컵 축구 경기에서 불거진 국가대표 선수들 간의 다툼은 '관계 속의 나' 대 '나를 위한 타인'의 충돌이었다. 나는 그리고 여러분은 과연 어디쯤 있을까? 어디로 가고 싶은가?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