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제주도민대회
[한라일보] 지난번 연재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주도기선의 영보환은 취항 두 달 만인 1928년 초부터 운항을 중지했다. 제주도기선의 자주운항 시도가 좌절되자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 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삯을 원래대로 편도 항해에 12원으로 대폭 인상했다. 평소 승객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 많은 불만이 누적된 제주사람들은 선박회사에 뱃삯 인하를 요구했으나 일본 회사 측은 이를 묵살했다.
제주도민대회 신문 기사 1928년 5월 2일자 중외일보
게다가 1927년 설립된 제주공제조합은 연간 1원의 회비를 제주-오사카 항로 탑승객에게 의무적으로 징수했다.
1928년 제주도민대회와 1929년 제주도민유지간담회를 주도한 김문준
일본인 제주도사(島司)가 조합장인 제주공제조합은 오사카 거주 제주도민의 노동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했다고는 하지만, 제주도 당국의 일본 도항정책을 후원하는 식민지 착취권력으로 도민들에게 인식되었다. 조선일보(1928년 5월 3일자)에는 "대중의 피와 땀으로 지출된 조합비", "제주도내 수많은 관제조합의 횡포"라는 직설적 비판기사가 실렸다. 같은 시기 제주해녀조합이 관제 착취조합으로 인식이 전환되어 해녀들의 저항에 맞닥뜨린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결국 인내를 견디지 못한 오사카 거주 제주도민들은 1928년 4월 25일 오사카의 천왕사 공회당에서 '제주도민대회'를 열었다. 3000여 명이 모인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제주공제조합 철폐의 건'과 '제주 오사카 항로 선임의 30% 인하' 등을 결정했다. 실행위원으로는 조천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문준을 비롯해 양성찬, 김성태, 성자선 등 15명이 선출되었다.
이들 실행위원은 승선 운임 인하, 승객 대우 개선, 화물 운임 폐지 등을 요구하며 조선우선, 아마사키기선 측과 본격적인 협의에 나섰다. 그러나 "새가 아닌데 날아갈 것인가, 고기가 아닌데 헤엄쳐 갈 것인가"라고 조롱을 받으며 단박에 거절당했다. 맨몸으로 달려든 시도가 일본 선박업자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제주통합조합준비회를 거쳐 동아통항조합으로
이제 제주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자주적인 선박 운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계획을 먼저 실행에 옮긴 사람은 아나키스트 고순흠이었다. 지난번 연재에서 고순흠이 주도한 기업동맹의 자주운항운동과 제2북해환, 순길환의 운항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다.
제주통항조합 창립취지서(1929년 4월 22일)
동아통항조합 임시대회 자료집(1930년 9월 8일) 강요배 화백 기증자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본격적인 자주운항운동은 김문준 등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김문준 등은 '제주도독립항로기성동맹', 제주도민대회 실행위원 측과 협의해 1929년 4월 '제주도민유지간담회'를 개최했다. 간담회 결과, 4월 22일 '제주통항조합준비회'를 조직해 창립취지서를 발표했다.(사진 3) 이들은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 대중적으로 힘을 뭉치고 우리의 손으로 제판(濟阪)간에 새로히 독립항로을 개척하야 우리가 스스로 경영하지 안으면 아니될 것을 각오하얏다"고 제주통항조합의 창립 목적을 뚜렷이 하였다.
제주통항조합준비회는 1계좌 5원으로 2만 명의 조합원을 모집해 총 10만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일보는 "대판에 있는 8만 제주도민은 모두 기뻐함은 물론 조합 설립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29년 11월 22일 조합준비회 집행위원회 월례회의 자리에는 제주도 전체 12면 162리 중 11면 95리 대표가 출석해 조합 설립을 의논했다. 준비회 측은 제주도 현지에 지사와 지구출장소를 설치해 리(里) 단위로 공동 가입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러한 제주도 마을 단위의 협동조합 방식은 아나키즘에 입각한 기업동맹 측에서 먼저 구상했던 바를 실현한 것이었다.
동아통항조합의 교룡환 출처 일본기선건명록 1928년 제주도민대회.
결국 조합준비위원회는 1930년 4월 21일, 오사카 나카노시마[中之島] 공회당에서 421명의 대의원과 20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여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내 119개 리가 가입했다는 결과가 발표됐고, '제주통항조합' 명칭이 제주도에 한정된다는 지적에 따라 폭넓은 의미의 '동아통항조합'으로 변경했다. 주요 슬로건 및 결의사항은 1) 조선우선, 아마사키, 가고시마우선 배를 보이콧 2) 도항저지와 간섭 반대 3) 거룻배 출입의 자유 4) 우리는 우리 배로 5) 통항조합의 이익은 우리의 이익 6) 제주공제회 박멸 등이었다.
동아통항조합은 창립대회 후 기금 모집, 조합원 확보 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자본의 부족과 일제의 탄압으로 당초 목표였던 1930년 7월 1일 개항일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8일 임시대회를 열어서 취항에 따른 제반 사항을 의논한 결과, 11월 1일을 첫 개항일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자료(사진 4)에 따르면, 창립대회 임원진의 총사임과 임원 개선의 건을 상정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임시대회를 통해 동아통항조합의 조합장은 신우(애월)면장 출신의 문창래가, 제주출장소장에는 홍순녕 등이 선출되었다. 조합 설립에 초석을 다진 김문준은 당시 재일 사회주의운동 노선의 전환 때문이었는지 조합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교룡환의 첫 출항
동아통항조합은 임시대회 후 겨우 6000원의 자금을 확보, 하코다테(函館) 나리타(成田)상회 소유의 교룡환(蛟龍丸, 3007t)을 임대해 11월부터 취항시켰다.
1930년 11월 1일 오사카항에서 첫 출항한 교룡환 사진.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
1930년 11월 1일 오후 6시, 입추의 여지 없이 승객을 태운 교룡환은 오사카항을 가득 메운 조선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했다.(사진 5) 당시 동아일보는 "제주-대판간 항로에 하루바삐 '우리 배'를 출항시키고자 분투한 결과, 교룡환이 출항케 되자 일본 해운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도항노동자들은 선임 6원50전을 내고 모조리 교룡환에 올라 입추의 여지가 없는 대만원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11월 16일 두 번째 출항에서는 1500여 명이 승선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룡환의 운영은 일단 성공적이었으나, 출항 지역을 제주도 이외 지역으로 확대하고 화물 운송도 담당해야만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과제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선박들은 12원 하던 뱃삯을 3원으로 파격 인하하며 경쟁에 나섰다. 결국 교룡환의 임대 기간이 1931년 3월말로 끝나자, 동아통항조합은 1만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제 동아통항조합은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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