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④동아통항조합의 활동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④동아통항조합의 활동
"복목환 완전 매수, 일익(日益) 발전하는 동아통항조합"
  • 입력 : 2024. 04.30(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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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동아통항조합의 결성과 교룡환의 첫 취항은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제주사람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자랑이고 긍지의 표상이었다. 당대 주요 일간지는 사실보도 기사, 시평 및 기고문, 탐방기사 등을 통해 동아통항조합의 활약상을 대서특필했다. 조선일보(1930.11.13.)에 실린 홍양명의 '동아통항조합과 제주도민의 궐기' 기고문은 조합의 출범과 교룡환 취항이 제주도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성과라고 소개했다.

(사진 1) 동아통항조합 오사카 본사를 방문 취재한 기사.1931년 12월 19일자 중앙일보

조합은 교룡환 임대 취항에 이어서 스스로 모은 자본으로 복목환을 직접 매수해서 취항시켰다. 오사카 직항로 개설 이후 꿈꿔왔던 자주운항운동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조선일보 1931년 11월 22일자에는 '해상의 대중'이라는 시평이 게재되어, "대중의 힘이 해상에 확고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대중 지지의 특수한 기업이 대중합작의 노력으로 대성공이 있기를 축하한다. 오늘날 조선의 정세에 있어 소비자 연맹의 형태로 통항을 보게 된 것은 필연이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또한 중앙일보 1931년 12월 19일자에는 '양대 기선회사 상대로 한 분투사(奮鬪史)'라는 제목으로 "2만여 조합원을 포용한 위용(偉容), 제주 남아(男兒)의 의기를 보라"는 현지 취재기가 실렸다.(사진 1)



복목환의 매수

1930년 11월 1일 첫 출항에 나선 동아통항조합의 교룡환은 1931년 3월말까지로 임대 기간이 설정되어 있었다. 성공적인 취항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박회사의 선임 인하 등 과열 경쟁으로 약 1만2000원의 부채를 안게 되었다. 결국 교룡환의 임대 계약 만료 이후 운항은 중지되었다.

조합 측은 운항의 재개를 위해 1931년 4월 26∼27일 오사카에서 제2회 정기대회를 개최했다. 4월 27일 저녁에는 제주도민대회가 열렸다. 현길홍 등 여러 연사가 등단하여 열변을 토하다가 경찰에 검속당했다. 경찰은 조합의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 노선을 문제 삼아 50여 명을 검거했다.

(사진 2) 동아통항조합의 복목환

(사진 3) 복목환 선실 내부 모습 삿포로시 중앙도서관 소장

이러한 탄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합원들은 더 강하게 결속되어갔다. 대회가 끝난 후 조합은 이사회를 열어 용선(傭船) 방침을 변경하여 배를 사서 직접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매선 준비금 5000원 모금을 결의했다. 이제 다시금 조합원 확대와 선박 구입에 필요한 기금 모집에 주력했다. 오사카 내에 13개, 간사이(關西) 지방에 4개, 제주도내 17개 등 조합지부가 조직되었고, 조합원은 총 1만여 명에 달했다.

경찰의 탄압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매선 협상은 진전되었다. 결국 9월 2일 북일본기선회사와 복목환(伏木丸) 매선 계약을 체결하고, 11월 3일 매선 수속을 마쳤다. 복목환은 1300톤급의 영국제 강철선으로 정원은 800명이었다.(사진 2, 3)

소재지인 홋카이도 오타루(小樽)항을 떠난 복목환은 11월 12일 마침내 오사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운집한 조합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배 안에서 축하회를 열었다. 조합장 현길홍(사진 4)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문창래·김달진의 경과보고, 동아일보 오사카지국 김기범의 축사가 이어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복목환 완전 매수, 태평양상에서 축하연, 일익(日益) 발전하는 동아통항조합, 만여 조원(組員) 노력 결정"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사진 4) 동아통항조합장 현길홍을 함경북도 청진 인물로 소개한 신문기사. 1936년 12월 18일자 조선일보



복목환의 출항

12월 1일 복목환은 334명의 승객을 태우고 오사카항으로부터 제주도로 출항했다. 당일 복목환에는 붉은 깃발 10개와 한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로"라는 자주운항의 슬로건과 "복목환 도항 저지 반대", "부르주아의 배를 타지 말자", "한때 싼 배에 속지 말라"는 구호가 적힌 깃발이 내걸렸다.

(사진 5) 복목환 출범 광경 사진. 1931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1931년 12월 4일자에는 '만여 조원 전송리 복목환 1일 출발'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출범 광경을 찍은 사진이 실렸다.(사진 5) "12월 1일에 드디어 무장을 튼튼히 한 우리 배 복목환은 만여 조합원의 성대한 전송리에 만원의 승객을 가득히 싣고 만세삼창리에 대판 항구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여 초항해를 떠났다. 금번이 초항해이니만치 당일에는 조합원 이외에도 재판 다수 동포까지 출동하야 항구 잔교 일대에는 '피땀으로 사놓은 우리 복목환!'의 복목환 행진곡과 함께 대혼잡을 이루었다 한다."고 출범 상황을 묘사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복목환 좌초! 우지끈하는 소리 가슴에"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복목환은 제주도로 향한 첫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오던 중인 12월 6일 밤에 구좌면 세화리 앞바다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복목환의 좌초는 조합을 열렬히 성원하던 조합원뿐만 아니라 도내외 제주도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동아일보(1931.12.8.) 1면 '횡설수설'에는 "우리의 배 동아통항의 '복목환'은 초항에 좌초! 우지끈 하는 소리 가슴에"라고 하여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는 촌평 기사가 실렸다.(사진 6)

(사진 5) 복목환 출범 광경 사진. 1931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애초 복목환은 1925년 6월에 사할린섬 남부 대박(大泊)항만에서 좌초된 이력이 있던 배였다. 제주도에서의 좌초는 선박 자체의 문제점과 제주도 해안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항행 기술 부족이 가져온 결과였다.

동아통항조합은 1만2000원에 달하는 막대한 수선비를 모금하여 수선에 착수했다. 결국 12월 30일에 수리를 마치고 이듬해 1932년 1월 2일부터 운항을 재개했다. 당시 동아·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등 한글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어 신문들도 연일 복목환의 좌초 상황과 예항(曳航) 이후 수리, 운항 재개 상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복목환에 쏠린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합 경영의 어두운 그림자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복목환의 운항은 1932년 3월까지 매우 순조로웠다. 왕복 승객 수가 평균 8백명을 유지하여 출항 3개월만에 7500원의 부채를 갚기도 했다. 그러나 복목환은 1932년 4월 10일 새벽에 일본 세토(瀨戶) 내해에서 다시금 좌초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좌초로 인해 수리비 부담이 가중되어 동아통항조합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조합은 1932년 5월 제3회 정기대회를 계기로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그러나 3회 정기대회를 계기로 조합이 대중적·정치적 투쟁조직으로 성격을 뚜렷이 함으로써 일제의 심한 탄압을 불러왔다. 1932년 하반기부터 조합 활동가들이 다수 검거되어 조합의 존립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동아통항조합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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