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고온 영향 단풍은 곱지 않아떨어지는 낙옆 보며 애잔한 느낌늦가을 석송은 더욱 푸르러 대조
[한라일보]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이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빈들판에 서면 허허로움이 밀려와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지난 한 해가 아스라이 뇌리를 스쳐간다.
깊어가는 가을날 단풍의 숲에서, 다시 만난 친구에게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를 보낸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그렇다. 숲의 나무는 거센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견디고 피워 올린 잎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내려앉은 잎들은 겨울을 따뜻하게 덮어 주며, 거름이 되고, 흙이 되고, 다시 새로운 잎을 피워낸다. 진정한 삶의 모습이며 정직한 사랑이다. 11월의 숲은 한 해 동안 달고 있던 나뭇잎을 조용히 떨구어내고 있다.
지난 한 해와의 작별을 예감하며 떨어지는 잎새가 애잔하다. 단풍은 추운 겨울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는 활엽낙엽수의 이별축제다. 우리들의 삶 또한 떠날 때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전날 하루종일 가을비가 내렸고, 아침부터 이슬비에서 가랑비로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오늘 발걸음의 무게를 불안하게 했다.
애기달맞이꽃
산철쭉
지난 2일 진행된 한라일보의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행사는 가랑비를 맞으며 14㎞의 오름과 숲길을 걸었다. 특히 이날 트레킹은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고성리에서 서귀포시 색달동으로 이어지는 광령천변, 천아숲길, 삼형제샛오름 남쪽1·2, 보림농장, 1100도로 18임반 입구까지 단풍이 아름다운 구간이다.
출발 장소인 제2광령교에서 이날 트레킹의 첫발을 내디딘다. 11월임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광활한 목장길이 천아오름까지 계속된다. 길가에는 삼나무와 예덕, 푸조, 새덕나무 등이 잎을 떨구고 개쓴풀, 산박하, 들깨풀, 송악덩굴 등 야생화가 소박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늦가을의 석송은 더욱 푸르른 모습이다.
천아삼거리에서 광령천변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비로 하천이 폭포를 이루며 장엄하게 흘러간다. 단풍나무 등 활엽낙엽수들이 붉은색, 노란색으로 듬성듬성 단풍을 뽐내고 있으나, 가을까지 이어진 더위와 이상고온으로 일찍 낙엽돼 예년에 비해 단풍이 곱지 않다.
엉겅퀴
석송
알꽈리
붉은오름 둘레길을 거쳐 살핀오름 서쪽 기슭에 도착했다. 전설처럼 들려오는 삼별초의 함성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애월읍 광령리에 소재한 붉은오름은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과 부하들이 자결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오름이다. 지금도 오름 토질이 붉어 적악(赤岳)으로 부르기도 한다. 살핀오름은 삼별초군이 망을 보면서 적의 동태를 살폈던 오름이란 뜻이다.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 전투에서 전멸 당하자 김통정 장군은 7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자결함으로써 삼별초 항쟁의 막을 내린다. 당시 기록을 보면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시신이 땅을 가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처절했던 싸움이었다. 이후 탐라는 100년 동안 원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일본정벌을 위한 함선 건조, 목마장 설치 등의 역할을 감내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청미래덩굴
송곳니기계충버섯
한라부추
천아숲길과 노로오름 삼거리 숲길을 걷는다. 삼나무와 단풍, 서어, 졸참, 산딸, 윤노리 나무가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서걱대는 산죽(조릿대)과 빗물 웅덩이를 건너다 보니 어느덧 삼형제샛오름 남쪽1·2 정상 등성이를 걷고 있다. 삼형제오름은 '큰오름, 샛오름, 말젯오름'이 형제와 같이 연이어서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오름 정상에는 붉은 빛이 도드라진 참빗살나무, 화살나무의 열매가 가을을 보내고 있고, 오름 너머에는 한라산 정상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오승국
청미래덩굴과 가막살 붉은 열매가 단풍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가 계속된다. 길고 긴 숲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보림농장이다. 이날 걸었던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이 즐비했다. 간간이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면서도 큰 비가 내리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우의를 벗었다. 답답했던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붉게 물든 단풍을 즐기며 색달천을 건너 보림농장 임도를 걸었다. 진정한 가을의 마음을 담아 한 해의 정리를 생각하며 이날의 걸음을 마감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승국 시인·제주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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