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영화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입력 : 2024. 08.02(금) 03: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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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탈주'.

[한라일보]  지옥은 어디에나 있지만 천국 또한 어떻게든 발견할 수 있다. 인생에서 몸과 마음의 지옥을 만나는 일은 생각 보다 더 빈번해서 우리는 늘 절망이라는 말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도와 희망의 천국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함께 결박된 상태에서도 우리의 영혼은 그 너머를 볼 수 있고 볼 수 있음의 시야는 우리의 등을 기어코 떠밀어 준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그렇게 나를 미는 바람이 되어준다. 나아갈 수 있도록, 나아질 수 있도록.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연출한 바 있는 이종필 감독의 신작 '탈주'는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두고 탈주를 감행하는 병사 규남(이제훈)과 그를 뒤쫓는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탈주'는 10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 타임 동안 두 사람의 추격전을 박진감 넘치게 선보인다. 또렷한 얼굴로 규남의 명징한 욕망을 드러내며 질주하는 배우 이제훈의 선명한 결기와 다채로운 표정 연기로 현상의 복잡한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극대화하는 배우 구교환의 시너지가 추격전의 단단한 골격 위에 생생한 육체성을 더하는 '탈주'는 올 여름 극장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탈주'는 대사가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대사들의 잔상을 추격전의 속도 위에 덧입히며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내 앞길은 내가 정했다'는 규남은 지옥을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자유를 억압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앞길이 정해져 있다는 회의적인 시선 속에서도 규남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앞길을 보고자 한다.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나가는 규남의 앞에 쉽사리 빛이 보이는 행운은 없지만 규남은 어둠의 끝을 보기로 작정한 것처럼 자신의 마음과 몸을 믿는 이다. 마치 성장 영화나 스포츠 영화의 주인공처럼도 느껴지는, 한계를 뛰어넘는 캐릭터 규남의 선명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추격하는 사람, 현상이다.

현상 또한 지옥에 사는 이다.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고위 간부의 자식이자 피아노를 전공한 유학파 예술학도인 현상은 남 부러울 것 없는 지위와 배경을 가진 이다. 하지만 현상은 어쩌면 규남 보다 더한 지옥의 계절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섬세함과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닌 현상은 체제 내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꺼트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잊을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그의 욕망은 여전한 어둠 속에서 조용히 타오른다. 그런 그의 앞에 질주하는 자, 규남이 등장한다. 잃을 것이 없는 이가 최선을 다해 내달릴 때 잃을 것이 많은 현상은 선망과 질투로 강렬하게 흔들린다. 영화의 후반부로 이를수록 전혀 다른 사람 같던 두 사람 규남과 현상이 사실은 같은 공간의 각기 다른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던 이들이라는 것을 관객들을 알게 된다.

'죽음이 아닌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고 오래 전 현상은 규남에게 전한 바 있다. 그 말을 가슴에 오래 품은 규남은 두려움 없이 자기 앞의 생을 향해 질주한다. 만약 그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규남에게는 삶을 위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 그의 종착지가 된다. 현상은 여전히 의미 없는 삶을 누구보다 두려워 하는 이다. 어쩌면 체제보다 더 클지도 모를 편견의 벽 앞에서 현상은 그 높이를 시시각각 체감하는 이다. 규남이 달려서 넘을 수 있는 선을 향해 간다면 현상은 붙잡을 것 없는 벽을 타고 올라야 한다. '탈주'는 스스로 앞길을 정한 자의 질주를 통해 지옥을 벗어나는 한 인간의 뜨거운 행적을 남긴 동시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용기를 내야할 또 다른 인간의 얼굴을 관객들의 가슴에 차갑도록 시리게 새기는 영화다. 현상이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높이 뛰어 오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충분히 자유롭기를 그래서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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