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 (25) '해녀 작가' 이유정 씨
집안 반대에도 해녀 도전… 못 이룬 꿈 '그림' 시작
전설 같은 해녀 삼촌들 화폭에 담으며 메시지 전해
"멋진 해녀 선배·해녀 전승자 되기 위해 공부할 것"
입력 : 2024. 09.04(수) 17:05 수정 : 2024. 09. 07(토) 07:48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올해로 해녀 5년 차인 이유정 씨는 해녀 삼춘들의 이야기를 캠버스에 담아내는 화가이기도 하다. 신비비안나 기자
[한라일보] 다시 한 번 만나야겠다 싶었다. 지난해 '어촌미래리더'를 취재하며 만났던 해녀 이유정(36) 씨를 말이다. 첫 만남에도 유정 씨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지만, 주제를 빗나간 탓에 한 줄을 쓰지 못했다. 그게 못내 아쉬웠을까.
"몽돌을 크레파스, 이호의 현사 검은 모래를 스케치북" 삼았었다는 그가 첫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에 궁금해졌다. 해녀이자 작가인 그가 캔버스에 담은 '해녀삼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 줄 것만 같았다. 한 해 전에 제주시 이호어촌계 근처에서 만났던 유정 씨를 지난달 14일 제주시 구좌읍의 한 갤러리에서 다시 만났다.
|반대와 좌절…
직장을 다니던 유정 씨가 돌연 해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선 호되게 반대했다. 어부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평생 지켜봤던 어머니는 해녀만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막았다.
"위험한 걸 누구보다 잘 아시니까요. 아버지는 배라도 타고 나가지만 저는 맨몸으로 나가잖아요. 딸이 안 아프고 늘 고왔으면 좋겠으니 '하지 마라', '가지 말아라' 하셨던 거죠. 그런데 전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랬던 유정 씨가 해녀가 된지 올해로 5년 차다. 2019년 해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정식으로 '해녀증'을 받아 물질하고 있다. 이호어촌계 17명 해녀의 한 명이지만, 이호 현사마을로 좁히면 2명 남은 해녀 중 하나다.
유정 씨에게 '그림'은 해녀 일의 시작과 닮아 있다. 그보다 먼저 반대에 부딪쳐 못 이룬 꿈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가 되길 원했지만 지원받을 형편이 안 됐다.
"화가가 되고 싶다고 '화판을 하나 사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미키마우스 화판이 정말 갖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절대 안 된다'고 말이죠. 저를 학원이나 이런 곳에 보내줄 수 없다고요. 그때 혼자 엉엉 울었어요. 화판 하나 가지지 못하고 공책에만 그림을 그리면서 '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지' 이랬죠. (돌이켜보면) 그게 지금의 원동력이고 동기가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도전'
잊었던 그림을 기억해 낸 것은 물질을 하면서다. 물속에서 해녀삼촌을 카메라에 담던 유정 씨가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하다 떠올린 게 '그림'이었다. 눈에 비친 아름다움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다.
"물속에 빛이 내리면 정말 무지개 같아요. 그 가닥 빛이 물속에 쏙쏙 들어오면서요. 해녀삼촌들에겐 매일 보는 광경이니 해산물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그 빛내림 속에 유연하게 헤엄치는 삼촌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오리발 차는 모습까지 여신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그 모습을 더 예쁘게 그리고 싶다, 저만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곧바로 미술학과 편입에 도전했다. "크레파스로 밖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유정 씨는 "졸업장을 받아야겠다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틈이 날 때마다 동영상 채널에 의지해 소묘를 연습했다. 준비 기간은 3개월로 짧았지만, 지난해 3월 다시 대학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고 있다.
일단 문턱은 넘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체계적으로 미술을 배워온 친구들이 쓱쓱 그림을 그려낼 때 유정 씨는 진땀을 뺐다. 할 수 있는 것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었다. 수학 공식 없이 문제를 푸는 것 같았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림 세계'를 키울 수 있었다.
"남들보다 되게 길게 가긴 했지만 저만의 색감으로 표현됐던 것 같아요. 교수님도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돼요'가 아니라 '유정 학생의 그림은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라고 칭찬을 해주셨죠. 만학도였지만 그런 관심과 지도로 무럭무럭 자랐다고 생각해요."
미술 만학도이자 올해 졸업을 앞둔 유정 씨는 지난달 첫 전시 '나에게 부는 바람, 제주' 기획전을 통해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전했다. 신비비안나 기자
|해녀, 그림으로 말하다
올해 졸업을 앞둔 유정 씨는 일찌감치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달 1~15일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비젠빌리지 갤러리 열린 '나에게 부는 바람, 제주' 기획전을 통해서다. 2명의 작가와의 단체전이자 학교 밖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표현한 '전설 시리즈'를 비롯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도전이우꽈 저항이우꽈' 등을 내걸었다.
전설 시리즈는 유정 씨의 선배이자 동료인 이호어촌계 해녀 6명을 우선 담은 작품이다. 젊고 예쁜 해녀 회장님, 패셔니스타 같은 모자가 화사한 홍자 삼촌, 빨간 볼이 매력적인 순옥 삼촌 등이 모델이 됐다. 작품 제목처럼 유정 씨에겐 '전설' 같은 존재들이다.
"지금까지 한 40~50년을 큰 사고 없이 물질해 온 여전사 같은 분들이에요. 영등할망처럼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사실 처음에는 예쁘게만 그리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그림마다 주름이 생겼어요. '삼촌들도 곱닥한 아이 피부였는데 물질을 하다 보니 이렇게 주름이 생겼구나', 제가 그리면서도 그 주름의 의미를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전시회에 걸린 가장 큰 작품은 곧 '이유정'이기도 하다. 물질을 가기 전에 고개를 치켜들기 전의 순간을 유화로 포착해 냈다. 해녀를 하지 말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해녀가 되고만 그는 "그림을 그리며 되게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두운 화폭에 떨어진 한 줄기 '분홍빛'처럼 어둠과 걱정, 번민, 불안, 갈등이 어지럽히는 속에서도 빛은 있다는 메시지였다. "새벽녘에 망설이는 이들에게 힘이 되길 바랐다"고 유정 씨가 말했다.
유정 씨가 해녀로, 어촌미래리더로, 작가로 보폭을 넓히는 것은 제주의 해녀문화를 알리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신비비안나기자
|"더 많은 이유정 생기길"
그는 머릿속에 벌써 또 다른 전시를 그리고 있다. 해녀가 맞닥뜨린 지금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다. 삶터이자 일터인 바다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는 일이다.
"다음 작품은 아마 굉장히 커다랄 것 같아요. 해녀들이 '쓰레기 바다'에서 물질하는 모습을 담아내려 준비 중이에요. 커다란 그림을 사람들이 무얼까 하고 보다가 '아 여기 해녀가 있었네', '멀리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던 게 사실은 다 쓰레기였네'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작가의 특별한 관점이나 새로운 걸 만들어냄이 아니라 제가 매일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이죠. 우리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질지도 몰라요. 이걸 어떻게 보여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이렇게 그림은 유정 씨가 물 밖에서 소리치는 수단이다. 해녀로, 어촌미래리더로, 작가로 보폭을 넓히는 것도 "더 크고 힘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싶어서다. '앞으로 2~3년이 지나면 나만 남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소리 내게 했다. 앞으로도, 어느 순간에서든 '마이크'가 주어지면 그는 말할 거라고 했다.
"제 바로 위 선배가 70대일 정도로 중간 허리가 없어요. 삼촌들은 '2~3년이 지나면 네 세상'이라고 하지만, 저만 남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죠. 세계가 인정한 공동체 문화, 불턱에 앉아 그날의 물질을 이야기하고 옹기종기 모여 성게알을 작업하는 모습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요. 그래서 저는 제 활동으로, 저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이유정 해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 해녀 문화를 널리 알리고, 해녀의 바다를 지켜주고, 해녀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활동을 해줬으면 하고 말이에요. 분명한 소명의식으로 말이죠. 그런 멋진 해녀 선배, 해녀 전승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나서고 더 많이 공부할 거예요."
취재·글=김지은 기자, 영상 촬영·편집=신비비안나 기자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당신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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