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감귤역사… 20세기초 온주밀감 도입
박영효·타케 신부 등 제주시·서귀포서 재배
○…'생명산업'인 제주감귤은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지금도 개방파고에서 힘겨운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한·미FTA, 한·중FTA, 한·일FTA 등 개방협상은 제주감귤을 더욱 위기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다. 한라일보는 '근대감귤 100년'을 맞아 지난해 10월 한미FTA 제주 4차협상에 맞춰 '제주감귤 100년' 연중기획을 시작했다. 본보는 올해에도 한·미FTA, 한·일 및 한·중 FTA 등 연쇄 개방협상, 제주감귤의 현주소, 발전방안 등에 대해 감귤농가, 독자들과 함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연중기획으로 보도한다.…○
▲20세기초 프랑스 출신의 타케신부가 감귤주산지인 서귀포지역에 온주밀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지금은 옛서홍성당자리에 한그루만이 남아 있다. /사진=한라일보DB
# 제주감귤의 역사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제주에는 많은 감귤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조정에 진상품 생산을 위한 것이어서 주민소득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관의 통제에 의한 재배로 그 민폐가 막심했다. 감귤원을 맡은 농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일부러 귤나무를 고사시키는 일이 잦았다. 진상제도는 조선조 고종 31년(1893년)에 이르러 폐지되었으나 농민들은 감귤재배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천년이 넘은 역사를 간직한 제주감귤은 근대적 의미의 산업으로 도입된지도 1백년전인 20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감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전환기를 맞는다. 이 때가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다. 근대적 의미의 제주감귤재배의 시작이다.
그 효시는 개화파의 주역인 박영효로 전해진다. 박영효는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일으킨 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후 1907년 9월에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1년간 적거생활을 했다. 그 후로도 유배기간을 합쳐 3년간 제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박영효가 제주에 거주하는 동안 원예작물의 재배를 널리 장려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제주도 기후가 일본과 흡사하다는 데서 도민에게 원예작물을 보급한다. 개량 감귤을 비롯해 토마토, 가지 등의 재배와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그는 개량 감귤을 제주시 구남천(구남동)에 심었으나 그가 제주를 떠난 후에는 점차 자취를 감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한 그루도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실기'에 따르면 '1910년부터 일본 귤목을 식부하고 관청에서 장려하여 매년마다 생산량이 많아져 갔다. 산남 서홍리는 일본 사람이 대규모로 경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백자훈 전 제주대교수가 전했다.
감귤주산지인 서귀포 지역 도입자는 20세기초 프랑스 출신의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한국명 嚴宅基) 신부가 효시로 전해진다. 성직자이자 식물학자인 타케신부가 감귤주산지인 서귀포지역에 온주밀감을 처음 도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때가 20세기에 들어와 1911년의 일이다. 훗날 우리나라 최대 감귤주산지로 탈바꿈한 서귀포지역 온주밀감 재배가 타케로부터 시작된다.
타케는 모두 14그루의 감귤을 심었으나 지금은 옛 서홍성당 자리에 1그루만 남아 있다.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열린 한미FTA4차 협상 때 감귤농민들이 협상 무효화를 주장하는 등 격렬하게 시위하고 있다. /사진=한라일보DB
이를 흥미있게 지켜보던 사람은 서귀포에서 상업을 하던 일본인 '미네'였다. 그는 타케의 경험으로 서귀포 지역에서도 온주밀감의 재배가 가능한 것을 보고 1913년에 많은 묘목을 도입해 서귀읍 서홍리에 심었다. 이 때 조성된 과원이 제주농원이며, 이는 처음으로 규모를 갖춘 큰 농장이었다. 이후 하논분화구 경사지 등으로 재배범위가 확대되었다.
일제때 감귤재배가 권장되었으나 재배기술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제주감협 40년사는 "감귤재배에 관심을 가진 농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제 탄압하의 농가경제의 여건으로 보아 감귤원 개원은 고도의 기술과 자본조달에 자신을 가진 특수농가만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일반 농가는 개원하는 농가가 별로 없었던 까닭에 몇 그루씩 정원수로 심는데 그치고 재배면적의 확대가 극히 지지부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4.3사건과 6.25로 생활터전마저 잃은 농민들이 많아 감귤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50년대 중반부터는 감귤재배농가가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1964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제주 연두순시에서 "제주감귤을 적극 장려할 것"을 특별지시함으로써 감귤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 감귤이 이른바 제주의 생명산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같은 증언과 기록은 감귤이 '대학나무'로 회자되면서 생명산업으로 제주경제에 버팀목이 되기 시작한지 1세기가 됐음을 뜻한다. '근대감귤 100년'은 감귤산업이 제주경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현대 제주사에서 감귤은 제주 제1의 '효자산업'으로 발전해 왔다. 제주의 경제적 부흥은 감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시기에 제주감귤은 다가올 1세기를 담보할 수 있는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 구가할 수 있을지 중대 기로에 섰다. 제주감귤은 1세기가 지난 21세기에 다시 시련을 겪고 있다.
/강시영기자 sykang@hallailbo.co.kr
감귤보호는 생존권 걸린 절규
95년 UR출범 개방후 감귤산업 '직격탄'
한미FTA 충격파 제주경제 몰락 위기감
'태풍의 눈'으로 다가온 한미FTA 협상은 제주감귤의 위기 국면을 한마디로 웅변하고 있다.
올해 타결이 예상되는 한미FTA 협상에서 제주의 최대 관심은 오렌지 등 감귤류에 대한 협상에 쏠려 있다.
우리 정부가 수정 양허(개방)안에 감귤류를 관세철폐 제외품목에 포함시켜 협상에 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여전히 미국은 농산물 분야 품목의 경우 "예외없는 관세철폐"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우리측이 감귤류의 관세철폐 제외품목 기조를 확고하고 일관되게 유지하며 협상에 임할지가 관심사다.
제주 감귤농가들은 세계무역기구 UR 출범 이후 감귤산업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못한다. 95년 UR 출범 이전 까지만 해도 제주 감귤산업은 지역총생산액(GRDP)의 20%를 점유했다. 94년 당시 감귤조수입은 5천5백21억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UR 출범에 따른 시장개방으로 감귤산업은 큰 위기를 맞았으며 농가들에 큰 시련을 안겼다.
오렌지 등 외국산 신선과일 수입량이 매년 급증하면서 97년부터 2003년까지 7년간 제주감귤은 사상 유례없는 유통혼란과 가격폭락사태를 겪었다.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마이너스 소득으로 감귤산업은 몰락위기에 직면했다.
농가들은 피눈물나는 구조조정과 생존적 차원의 자구노력을 펼쳐 왔으며 희미하게 나마 감귤회생 기반을 어렵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충격을 딛고 채 일어서기도 전에 한미FTA 협상이 제주농가들을 다시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한미FTA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무효화를 주장하는 제주도 농가들의 목소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이 걸린 절규나 다름없다.
/강시영기자 sykang@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