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0. 정뜨르 비행장(2)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0. 정뜨르 비행장(2)
"시산혈해의 대지에 흐르는 뼈의 노래여"
  • 입력 : 2007. 12.04(화) 00:00
  • 최태경 기자 tkchoi@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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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뜨르 서비행장은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2년 개장되었다. 이후 미군정기와 4·3, 그리고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제주현대사 최대의 시련기를 겪으며 이 드넓은 대지는 제주 섬 주민들을 끌어다 학살하는 총소리와 비명소리만 가득한 죽음의 땅이었다.

이곳은 4·3 당시 일상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을 끌어다 총살하는 최대의 학살터였으며, 피로 범벅된 시체더미가 산을 이룬 시산혈해(屍山血海) 땅이었던 것이다.

대규모 학살 이후에도 이곳 정뜨르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므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유족들은 죽음의 사실은 알지만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다.

최근 제주자치도가 발주하고 제주4·3연구소와 제주대학교가 구성한 유해발굴단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옛 정뜨르 비행장 4·3유해발굴사업에서 다량의 유해와 유품, 총탄 등이 발굴됨으로써 4·3 당시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근 60년만에 금기의 역사였던 4·3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학살터



현 제주국제공항은 1972년도부터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동서 활주로가 도두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학살터들은 토사가 덧 씌워졌으며 일부의 유해는 공사 중에 교란되거나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또한 도두리의 집단학살터였던 '궤동산'과 '돔박웃홈'도 동서활주로에 포함되고 말았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발간한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도두지서에 오랏줄에 묶여 감금되었던 주민들을 군인들이 지시에 의해 돔박웃홈에서 여러 명이 일렬로 세워져 총살되었다. 돔박웃홈에서의 학살은 1948년 12월과 1월에 걸쳐 여러 날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궤동산에서는 1949년 2월 20일,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화북 등지의 주민 76명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미군은 이례적으로 이 사건을 목격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뒤 상부에 보고했다.

'민간인 소요, 추가보고에 따르면 2월 20일 도두리에서 반도 76명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피살자 중에는 여성 5명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과 헌병이 처형을 감독했다. (국군보고)

(논평) 우연히 미 군사고문단원 4명이 반도 38명의 처형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38명은 처형돼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반도들은 총살집행대 앞에서 민보단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이 민보단에 의해 행해진 대량학살에 대한 최초의 보고이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일지, 1949. 4. 2'



제노사이드의 전형



이 사건은 토벌대의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화북과 도두리 주민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으로 연행된 주민들은 스리쿼터 2대에 태워져 왔는데 옷을 발가벗긴 채 파놓은 구덩이 속에서 철창으로 피살당하다가 나중에는 총으로 사살했다고 한다. 도두지서(주임 김영철)의 경찰들은 "여기 잡아온 사람들은 도두리를 습격했던 폭도들"이라며 도두리 청년들에게 직접 죽이라고 총을 들이대며 협박했다고 한다. 사람 목숨이 미물보다 못하던 처량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뜨르를 포함한 제주국제공항은 이번 발굴에 포함된 1949년 군법회의 사형수(2차 대상지)와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자 학살(현재 발굴 중)터 이외에도 여기 저기서 죽어간 학살터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제주4·3연구소(소장 이은주)가 주축을 이룬 유해발굴단은 '묵은몰래물', '새몰래물', '어영' 등 당시 비행장 인근 주민들의 다양한 증언을 토대로 학살·암매장 지점을 찾아내어 유해발굴 작업을 한 결과 여러가지 의미있는 4·3 당시 주민학살의 실체를 찾아냈다.

우선 발굴 결과 40여구의 완전유해와 750여편의 부분유해, 그리고 탄피, 탄두, 단추, 혁대, 신발, 옷감, 금속줄, 도장, 목걸이식 팬던트, 안경, 지갑, 담배파이프 등 80여점의 유류품이 발굴, 수습되었다.



흐르는 눈물과 드러나는 유해



유해매립구덩이 가운데 부분의 바닥면 유해들이 2~3층으로 눌리거나 서로 뒤섞여 유해의 개체수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교란이 심했으나 발굴전문가들에 의해 무난히 수습되기도 했다.

이번 발굴을 통해서 그동안 미궁에 빠졌던 예비검속학살 실태의 실마리가 풀려가고 있다. 우선 2개의 도장과 대정중학교 단추를 통해 백조일손 희생자와 서귀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중 일부가 정뜨르에 끌려와 학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예비검속을 포함한 4·3의 전 과정에서 교사들의 희생이 컸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또한 발굴 현장에 소설가 김석범, 현기영 선생 등 수많은 유족과 도민들이 방문하여 학살의 현장을 보고 갔으며, 특히 양문흠(동국대 철학과) 교수 가족들이 방문하여 2차발굴대상지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현장발굴요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독립운동가이신 아버지는 2차군법회의 사형수 학살터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뼈의 눈물 도장의 노래



이번 발굴과정에서 최대의 관심은 2개의 도장이 유해의 품에서 발굴되어 도장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초점이 모아졌다. 발굴단의 추적 조사에 의해 도장의 주인이 당시 희생자인 양봉석(梁奉錫·남원 의귀)과 김희전(金凞銓·서귀 호근)으로 밝혀졌다.

양봉석은 의귀국민학교 임시교사로 있다가 19세 나던해, 1950년 6월 26일 서귀포경찰서에 예비검속으로 수감되었다가 이곳에 끌려와 희생되고 만것이다. 신고된 희생자 중 동일한 성명이 유일하여 당사자로 확실하게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와 동향인 김계수(의귀) 할아버지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서귀포 감자창고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군인들이 들이닥쳐 조사할 것이 있다며 수갑을 채워 차에 실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다음날 석방되었다.

김희전은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대정국민학교 교사로 있다가 24세 나던 해, 모슬포 감자창고에 예비검속으로 수감되었다가 정뜨르에 끌려와 희생되었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부인이 구금된 지 3~4일 후 희생자 면회를 갔더니 '살아남을 희망이 없다'는 말을 했다며 나중에 소문을 듣고 어머니가 모슬포로 갔으나 절간 고구마 창고에 잡혀갔다는 소문만 듣고 시신이 묻힌 곳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4·3연구소 장윤식 책임연구원은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347명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학살된 점과, 당시 김희전이 대정국교 교사로 재직했었으며 비슷한 크기의 결재인을 사용했던 점으로 보아 도장이 주인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윤세민(강정) 선생은 "김희전 선생과 함께 대정국교에 근무했었으며 모슬포 창고에 함께 수감 중이었는데 나중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북청년단 출신 선생과 불화가 있었는데 그게 죽음의 이유가 된 것 같다"라며 증언했다.

발굴된 도장하나가 60년 전의 암호를 풀어가듯 여러 가지의 의문들을 해소시켰으며, 죽은자와 산자가 다시 만나는 영혼의 다리를 이어 주고 있는 것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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