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1)프롤로그

[제주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1)프롤로그
제주 빛낸 걸출한 인물 재조명·기념사업 절실
  • 입력 : 2009. 01.01(목) 00:00
  • /강시영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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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21세기의 비전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환경과 문화에 방점을 찍는다. 환경은 곧 자원이다. 아름다운 땅, 제주는 2007년 세계자연유산의 반열에 올랐다. 지구촌의 가장 걸출한 자원 중 하나로 제주가 평가된 것이다. 제주 생태계 등 자원의 가치를 비로소 재평가한 것은 1백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 자연유산에 대한 관심은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높았고 연구 역사도 맥을 같이한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제주를 주목했으며 제주의 자연유산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기까지 많은 선각자들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다. 이들은 제주자연과 문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제주도학의 선구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취와 업적은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탐라역사문화는 제주인의 정신적 자산이다. 한라일보가 연재하는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은 지난 1세기 동안 제주의 자연과 문화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추적한다. 가능하다면 이들의 족적을 발굴 선양하기 위한 소박한 시작이다. 선각자들의 헌신적인 열정을 더듬어보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 연재는 제주에서 회자되는 걸출한 인물 중 몇인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 부종휴(1926~1980)

평생 한라산·동굴탐사에 열정바친 제주인

세계자연유산 등재 초석… 빗돌조차 없어

만장굴 최초 답사 '꼬마탐험대'도 잊혀져


'산과 브람스와 커피, 파이프와 한라산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분.'

제주시 구좌읍 비치미오름 자락에 누워있는 한산(漢山) 부종휴(1926~1980) 선생의 묘비명은 평생 자연인으로 살다간 그를 가장 절묘하게 표현한다. 부종휴는 근·현대 제주를 대표하는 토종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평생 한라산과 동굴속을 헤집고 다닌 식물학자이자 동굴학자로 기억된다. 해방 이후 식물과 동굴, 산악, 고고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제주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자원을 발굴하는 데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자랑스런 제주인이다.

부종휴는 식물학자였다. 그는 해방후부터 지난 1970년대까지 혼자서 한라산의 식물을 조사하고 학계에 알리는 작업을 해 왔던 인물이다. 1천4백여종에 그쳤던 한라산 식물에 3백33종을 새롭게 찾아냄으로써 오늘날 한라산을 1천8백여종이 자생하는 '식물의 보고'로 부각시켰던 게 부종휴이다. 그가 60년대초 후학들에게 '제주식물을 십년만 파고들면 세계적인 학자들도 머리를 숙여 올 것'이라고 한 것은 선각자의 혜안과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종휴는 한라산 정상만 3백50여회 등정한 제주산악운동의 개척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적십자산악안전대 창립을 주도하고,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10개의 등반코스를 새롭게 정립하기도 했다. 이런 풍부한 현장경험과 조사는 한라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데 결정적 토대가 됐다. 그가 1974년 집필한 '한라산 천연보호지구, 자원보고서'는 그 결정판이다.

만장굴과 빌레못굴, 수산굴, 서귀포 미악 수직굴 등 세계적인 제주의 용암동굴들과 그 속에 묻혀 있던 고고·역사적 유물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해방 이듬해 김녕초등학교 '꼬마탐험대'를 이끌고 암흑세계의 만장굴을 최초 답사해 세상 밖으로 알린 주역이 바로 부종휴이다. 은사였던 부종휴를 따라 미답의 만장굴 탐험에 성공했던 감동적인 스토리의 주역들인 코흘리개 어린 학생들은 대부분 고인이 됐으며 지금은 일부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부종휴와 그를 따라 미답의 동굴탐험에 나섰던 전대미문의 '꼬마탐험대'를 기리기 위한 노력은 커녕 그 흔한 빗돌 하나 없는 실정이다. 각종 자료 정리와 그를 기념하는 사업이 시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석주명(1908~1950)

세계적 나비학자 명성·근대 생물학 정립

해방직전 제주에 머물며 '제주학' 기틀

명예의 전당 헌정… 기념사업 지지부진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지난해 11월 우리나라 나비분류학의 선구자인 석주명(1908~1950) 선생을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 헌정 대상자로 최종 확정했다. 현재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는 최무선, 장영실, 허준, 우장춘 등 수백년간 우리나라 최고의 토종과학자들의 면면들이 망라돼 있어 석주명의 업적을 웅변한다.

석주명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나비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20여년의 연구생활 동안 나비분류학 분야에 대한 1백2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한국산 나비에 대해 외국 학자들이 잘못 붙인 동종이명 8백여개를 정리했다.

제주인들이 석주명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평양출신의 석주명은 제주인보다도 제주를 아끼고, 열렬히 제주를 탐구했던 인물이다. 지난해 탄생 1백돌을 맞은 석주명은 제주도에 대한 무한애정을 쏟아부었던 학자로 평가된다. 나비박사로 알려진 그이지만 제주에서는 '제주학 연구'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1936년 곤충 채집을 위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7년뒤엔 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 책임자로 부임한다. 1943년 4월부터 45년 5월까지 2년 1개월 동안 제주에 근무하면서 나비 채집과 제주학 연구에 몰두했다. 곤충의 보고이자 남다른 문화를 가진 제주에 매료된 그는 섬에 머무는 동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누비며 곤충상, 방언, 민속, 향토사, 동식물 등 갖은 자료를 수집해 분류하고 연구해 나갔다.

제주를 떠난 그는 서울신문사 출판국에서 제주도학의 선구적 의미를 갖는 제주도총서를 잇달아 발표한다. 1947년 '제주도방언집'을 그 첫 작품으로 출간했고 1949년에는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와 '제주도관계문헌집'을 펴냈다. 나머지 원고는 동생이 보관했다가 '제주도수필'(1968), '제주도 곤충상'(1970), '제주도 자료집'(1971)으로 그 결실을 맺는다.

석주명 탄생 1백돌을 맞아 제주에서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추모사업과 학술대회 등을 개최해 오고 있는 데는 석주명이 제주에 남긴 족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념사업은 지지부진하다. 2010년은 고인이 된지 60주기가 되는 해이다.

[제주를 알린 외국인들]1백여년전 제주가치 재평가 선도

타케 신부- 왕벚나무 등 제주식물 재평가
겐테 박사- 1950m 한라산 높이 최초 측정
재조명·글로벌 네트워크 등 기념사업 전무


▲타케 신부, 겐테 박사

근대에 들어 제주 화산섬과 생태계의 가치를 재평가한 사람은 서구인과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식물을 비롯해 곤충, 동물, 조류, 지질연구의 태동이 그랬다.

제주의 식물이 외국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 전의 일이다. 학자들은 이를 제주도 근대 식물연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 이후 1906년 프랑스 출신의 타케신부(Emile Joseph Taquet·1873~1952)가 왕벚나무 등 수만 점의 식물표본을 유럽의 대학이나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매각함으로써 제주의 식물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식물학자들은 타케가 제주에 머물렀던 기간이 한국 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 때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제주도의 식물이 제주도 세가지 보배(언어, 수중자원, 식물)중 하나로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부터 출발한다.

제주도의 곤충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1847년이다. 이는 우리나라 곤충이 세계 학계에 발표된 최초의 일이지만 1906년 일본인 이치가와가 제주도의 곤충 전반에 걸친 논문을 발표한다. 이후 석주명은 1930년대부터 나비를 중심으로 논문을 집대성하기 시작해 제주도 곤충연구와 제주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지질학적인 재발견은 독일의 지질학자이자 언론인인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1870∼1904)의 한국여행기를 통해서였다. 그는 1901년 '이재수란'이 발생한지 수주일 뒤 제주에 왔던, 당시 독일 퀼른신문의 아시아 특파원이자 지리학 박사였다. 그는 영실 옛등반로를 따라 한라산을 올랐는데 서양인은 물론 외국인으로서 한라산을 처음 등정한 인물이다.

당시 제주에 도착한 그는 약 3주간 제주에 머물며 제주목사의 도움으로 10여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한라산에 오른다. 여행기에서 그는 오백나한 전설이 깃든 영실의 옛 등반코스로 정상에 오른 후 '무수은 기압계 두개를 주의깊게 이용함으로써 나는 가장 가파른 곳 최외곽 분화구 가장자리의 높이가 6,390피트(1,950m)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더구나 그는 이를 퀼른신문(1901년 10월13일∼1902년 11월30일)에 연재했다.

'겐테의 한국여행기'는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겐테의 여행기는 그가 세상을 떠난(1904년)지 1년 뒤인 1905년 그의 동료 '베게너(Georg Begener)'박사에 의해 베를린에서 '겐테, 코리아'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면서 유럽에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케와 겐테 등 제주의 진가를 국내외에 알리고 제주도학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기여한 서구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과 글로벌 네트워크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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