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법](30)당근 케이크 만드는 권혁란씨

[이 사람이 사는 법](30)당근 케이크 만드는 권혁란씨
"구좌 당근으로 희망의 케이크 빚어요"
  • 입력 : 2009. 08.15(토)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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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에서 '당근 케이크 만드는 여자'로 변신해 남편과 함께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에 정착한 권혁란씨가 구좌 당근을 재료로 구워낸 빵을 포장하고 있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제주서 여생 보낼 계획…남편과 귀덕리에 정착
맛 · 향 다른 구좌 당근…케이크의 최상급 재료


주홍빛 당근으로 케이크를 만드는 여자, 권혁란(59)씨. 70년대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그는 미국에서 25년간 살다 몇해전 귀국했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포스코에 근무하던 남편과 늘상 제주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다짐했던 그다.

생활정보지를 뒤져 찾아낸 곳이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한라산과 바다가 동시에 눈에 걸리는 곳이다. 그는 15년동안 비어있던 건물에 '하우스 레서피 당근 케이크'로 이름 붙인 가게를 차렸다. 지난 5월의 일이다. 낯선 땅에서 연둣빛 봄을 넘기고 비날씨와 햇살이 다투는 여름을 막 나고 있는 그에겐 '향수병'을 읽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한번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나이가 60~70이 되어도 일을 하고 경제권을 가지려면 멈춰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아나운서를 그만둔 뒤에도 걸프전 소식을 생생히 전하는 해외 통신원으로 주목을 끌었던 그는 차(茶)와 요리에도 관심이 남달랐다. 2005년엔 '세가지 색 차 이야기'를 냈다. 요리학교를 다니거나 제빵학원을 드나든 적이 없지만 남편 일로 손님을 치르면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갔다.

당근 케이크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년이 넘는다. 지금껏 빚은 케이크만 수십만개다. 미국에서 사들인 요리책에 나온 조리법을 익히면서 차츰 그것들과 맛과 향이 다른 당근 케이크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케이크를 만들어 판 것은 아니다. 귀국후 서울에서 가게를 운영했고, 이젠 제주에서 당근 케이크를 굽고 있다.

까다롭게 재료를 구하는 그에게 구좌읍 당근이 눈에 띄었다. 권씨의 표현대로라면 깊은 맛, 고운 빛깔, 달뜬 향을 품은 게 구좌 당근이다. 구좌 지역은 제주산 당근의 70%가 생산되는 곳이다. 제주에 정착하기전 그는 구좌를 몇차례 찾았다. 당근을 테마로 구상해놓은 여러 일을 그곳 주민들과 함께 풀어내고 싶은 마음에서다. 제주 사람이 된 지금, 그는 언젠가 구좌가 당근을 통해 의미있는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를 만난 날, 새벽녘에 서울, 울산, 광주 등지로 부칠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구워낸 케이크가 담긴 상자에는 '제주 구좌 당근입니다'란 딱지가 꼭 붙는다. 혼자서 가게를 꾸리는 탓에 더러 일손이 필요한데 그럴 때면 퇴직 후 번역일을 하는 남편 김경화(58)씨가 조용히 그를 돕는다.

말차 당근 케이크, 브로콜리 당근 케이크, 초코칩 당근 케이크…. 시행착오를 겪으며 당근 케이크가 진화해왔고, 그의 구좌 당근 사랑도 짙어지고 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채소가 들어있는 당근 케이크를 먹으며 웃음짓는 이들은 그의 지친 어깨를 다독여주는 힘일지 모른다.

"케이크가 완성되려면 4시간이 걸려요. 살다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도 있는데 케이크를 만드는 동안 그게 잊혀져요. 당근을 채썰고, 밀가루를 반죽하다보면 잡념이 없어지더라구요. 빵이 다 만들어질때 쯤엔 저절로 희망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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