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떵살암수과]안경점 운영 박일성씨

[어떵살암수과]안경점 운영 박일성씨
부모 역할 떠안은 맏형의 동생 사랑
농사꾼 부모 대신해 동생 네명 뒷바라지
  • 입력 : 2010. 12.16(목) 00:00
  • 표성준 기자 sjpyo@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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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맏형은 네 명의 동생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지만 큰형은 장남으로서 으레 살림이 어려운 부모님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는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동생들은 잘났다"고 만족해한다.

제주시 중앙로에서 안경점을 운영하는 박일성(55)씨.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남 곡성군 옥과읍의 시골 마을 출신이다. 육남매 중 누나와 밑으로 남동생이 넷이나 있어 부모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특히 엄한 부친은 매까지 들어가면서 공부를 재촉했지만 반항심 가득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지난 1972년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시 안과에서 3년 정도 근무한 그는 이후 안경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잡아갈 무렵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전남 광주에 가서 일을 할 요량이었지만 제주보다 더 열악한 현실에 서울 명동 안경점에 취직해 기술을 익혔다. 1978년 어느 날 제주 안경점주가 서울까지 찾아와 다시 가게를 봐달라고 요청해왔다. 그의 성실함에 반한 안경점주는 이후 월세만 받고 안경점을 넘겨줬다.

사업은 번창해갔다. 1983년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 갔다오는 길에 고향집에 들러 중학교 3학년이던 셋째 동생과 초등학교 6학년이던 넷째 동생을 제주에 데리고 왔다. "농사짓는 부모님들 수입으로는 동생들을 대학에 못보낼 것 같아서 전학시켰어요." 고향에 머물렀던 큰 동생과 작은 동생 등록금 지출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부모님이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만큼은 책임지려는 생각이었지요." 그가 거둔 셋째 동생은 이후 기술사를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넷째 동생은 의사가 됐다.

도와주기 좋아하는 천성을 가진 것일까?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에게는 성인이 된 후에도 사업자금을 보탰다. 안경을 맞추러온 모녀 손님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고등학생이었던 딸이 잘되라고 사글세비용을 대 방을 얻어주기도 했다. 몇 년 전엔 한 친구가 "10년 전 어려울 때 집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걸어와서 친구를 도와준 사실을 기억해낼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60년대 폐병으로 고생해 바람 불면 날아갈 정도로 몸이 약했어요. 액취증도 앓았는데 저만 빼고 동생들이 모두 그 병을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돌보고 있던 동생들은 물론 고향집에 머물던 동생들까지 제주로 불러들여 수술을 시켰다. "저만 유전이 안돼 복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좋은 시절이었지요"라고 회상하는 그에게도 5년 전 위기가 닥쳤다. 둘째 동생 가족이 이사를 하는데 도우러 갔다가 철문에 머리를 다쳐 뇌진탕을 당했다. 3개월에 걸쳐 두 번 수술했지만 그를 치료했던 제주도의 의사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는 암울한 진단만을 내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 아내는 그를 서울로 데려가 수술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동생들 공부와 사업시키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느라 그 많던 재산이 이젠 많이도 줄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이 만족스럽다. "장남의 역할이 중요하잖아요. 아직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 자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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