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인 고 이숭녕 박사가 지은 유허비는 명도암 선생이 유배 중인 이익에게 수학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고홍진 - 현존 제주도 읍지 중 最古 '탐라지' 저술김진용 - 귤림서당 전신 장수당 지어 유학자 양성
이익 집안에는 그가 사마시(소과)에 이어 식년(식년시·대과) 을과에 연달아 장원급제해 받은 교지(사령장)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 방목(과거 합격자 명부)에는 그가 조정에서 3년마다 시행하는 문과 정기시험이자 합격 정원이 33명에 불과한 식년시에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익이 제주에 유배되자 목사 이괄은 그를 동몽교관으로 발탁해 후학을 양성하게 한다. 관아에 부속된 학교에서 벼슬아치와 지역 유지들의 자녀 중에서도 뛰어난 영재들을 가르친 이익은 지금까지도 제주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고홍진과 김진용을 발굴해낸다.
고홍진(1602~1682)은 1666년(현종 7년) 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며, 당시 전국 28명의 급제자 중 제주에서는 고홍진과 함께 문영후와 문징후가 포함됐다. 고홍진은 이후 조선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성균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전적(정6품) 벼슬을 받기도 했다. 고향 제주에 내려와 향교에서 유생들을 교육하는 교수가 된 그는 현존하는 제주도 읍지 중 가장 오랜 '탐라지'를 남긴다. 이원조 목사가 편찬했다는 탐라지의 사실상 저자인 그는 제주의 자연환경에서부터 인물·시문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특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해 17세기 중엽 제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후 제주도에 관한 문헌들은 모두 탐라지를 기초자료로 활용하게 됐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명도암 선생 유허비
김진용(1605~1663)은 역시 사마시에 급제한 뒤 숙녕전(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전각) 참봉(종9품)에 제수됐지만 귀향했다. 이후 그는 지금의 제주시 명도암에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교학을 일으켜 사람들이 그가 거주하던 지명을 따 명도암 선생이라 칭송했다. 특히 그는 이괴(1607~1666) 목사에게 선비를 양성하기 위한 학사를 세우자고 제안해 지금의 오현단 자리에 장수당을 건립하게 했다. 이괴는 장수당에 학생 35명을 기숙시키며 학업을 닦게 했는데, 후에 충암사(김정의 사묘)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명실상부한 서원인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됐다. 이괴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만일가가 감목관직(조선시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종6품 외관직)을 세습하게 된 데에는 비슷한 연배인 이괴와 함께 고홍진, 김진용이 큰 역할을 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당시 조선 최대의 목장이 있었던 제주지방에서는 제주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이 감목관직을 겸임했다. 이 때문에 김만일가는 사복시의 지휘와 견제를 받으며 계속해서 말을 수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승정원일기에는 제주목장과 관련된 폐단과 사복시의 행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연안이씨의 '존경록(尊敬錄)' 이괴 부분에는 이괴 목사가 말 공납 폐단과 사복시 행패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해 효종 임금이 그 개선책을 사복시에 걸어두게 한 일과 말에 낙인 찍는 일을 처음으로 시행했다는 내용도 있다.
말 수탈을 피하기 위한 감목관 세습 역시 이괴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 임금에게 요청해 이뤄졌다. 그 사실은 제주 경주김씨의 문헌인 '초대 감목관 김대길의 실록'에 언급되고 있으며, 1800년대 말 남만리가 지은 '탐라지'의 '관풍인물난' 이괴 부분에서도 녹산장 감목관을 주청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2년 1개월의 짧은 목사 재임 기간에 이괴 목사가 사복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김만일가에서 감목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까지 자신과 뜻을 같이해 장수당을 짓고 학자를 양성한 김진용의 조언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고홍진은 자신의 차남인 고상흘이 김만일의 손녀와 결혼해 김만일가와 사돈관계를 맺었으며,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진용의 일가였다. 이익의 제자이면서 당시 제주 최고의 학자였던 고홍진과 김진용이 스승에 대한 보답이자 사돈집안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목사에게 진언해 김만일 집안이 감목관직 세습이라는 특권을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만일의 3남 김대길이 초대 감목관이 된 이래 감목관직을 세습하게 된 김만일가에서는 산마장에서 자유롭게 말을 길러 이후 국가에는 3년마다 200필씩 말을 바치는 일이 정례화됐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