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2)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2)
유배인이 날마다 일기를 쓰는 까닭은?
  • 입력 : 2012. 08.27(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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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이 방성칠난 때 피난길에 머물렀던 조천리 김응전 집. 당시 김윤식은 제주성을 떠나 성산읍 시흥리까지 피난을 갔으며, 돌아오는 길에도 이곳에 들렀다. 이 집에서는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창의군 거사 계획도 논의됐다.

일상의 소소함 빠짐없이 기록·이재수란 과정도 서술
방성칠난 일어나자 성산포 피난길 나서 섬 탈출 시도

김윤식은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모두 일기로 기록해놓고 있다. 88세의 고령으로 사망하기 20일 전까지도 일기를 쓴 그는 '속음청사(續陰晴史)'를 남겨 전하고 있다. 유배 중인데도 날마다 일기를 쓴 것은 그만큼 기록에 충실한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유배 중 경험한 방성칠난과 이재수난의 처음과 끝을 상세히 서술했으며, 유배 중 직간접적으로 교유한 인물의 이름과 신분도 남김없이 기록해 속음청사에 오르내리는 사람만 해도 360여 명에 달한다.

'속음청사'에 앞서 일찌감치 '음청사'라는 일기를 써온 것을 보면 무엇보다 자신이 청백한 삶을 증언하기 위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물론 지인들의 축첩과 음주가무 등 현재의 시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각들도 모조리 글로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고, 창간사를 쓴 언론인 출신이어서 일상의 소소함도 역사의 일부라는 믿음에서였을까? 아니면 기울어가던 국운만큼이나 사회가 지향하던 청백리상도 퇴색해서였을까? 그는 다른 유배인들이나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다니며 매일같이 퇴기들을 불러 술을 곁들인 놀이를 이어가면서도 일기의 말미에는 마치 후렴처럼 '나라가 걱정된다'고 반복해서 탄식했다.

투옥된 지 40일 만인 1898년 2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제주성안 교동(지금의 제주시 관덕로) 김응빈 집에 유배지를 마련해 옮긴다.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은 김윤식이 제주에 유배돼 투옥됐을 때부터 감옥을 찾아가 친분을 쌓았다. 김윤식은 김응빈의 집에 머물 때 고관대작의 지위와 신분을 유지했던 서울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이어갔다. 김응빈의 집을 중심으로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다른 유배인들도 거처를 마련해 담장을 트고 왕래했다. 그런 그를 만나기 위해 저녁마다 술과 음식을 대동한 제주 유지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집채가 널따랗고 높아 시원하며 화려하고 좋아 책상탁자도 정결했다. 또 화원에 산보할 곳도 있었고 주인의 접대도 아주 후하였으며, 내놓는 음식도 풍미가 입에 맞아 서울 맛이 안 나는 게 없다. 오래 적객의 신분으로는 더욱 분에 넘친다. 한참서, 황감역, 김응해, 정자유, 송대정, 이주사 풍식, 긍식, 홍주사 종시, 장규열이 와서 만났다."(속음청사. 1898년 2월 20일)

그가 김응빈 집에 터를 잡은 지 얼마 후 제주시 아라동에서 화전을 일구어 살던 방성칠을 중심으로 화전민들이 가혹한 세금 착취에 반발해 무술민요를 일으킨다. 이른바 방성칠난이라고 불리는 이 민란은 처음에 화전민 등 수백 명이 제주목사에게 화전세 등 과중한 과세를 폐지해달라고 소청(訴請)해 약속을 받아냈지만 이행하지 않자 제주 3읍 농민들과 함께 무장봉기한 사건이다.

방성칠은 유배 중이던 최형순·김낙영을 포섭한 뒤 민군의 좌·우대장으로 삼는다. 최형순은 흥선대원군의 적손(嫡孫)인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던 이준용 모반사건 때 김학우를 살해한 혐의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됐으며, 한말 의금부도사였던 김낙영은 이근용 역모사건에 연루돼 유배된 인물이다. 유배인을 포섭한 것은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김윤식은 당시 방성칠이 호언장담했던 말을 속음청사에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지금 나라의 운이 이미 쇠퇴하여 진인(眞人)이 바다의 섬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또 제주에 적객이 많기가 요즘과 같은 적이 없는데, 문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는 하늘이 나의 거사를 돕는 것이다. 지금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다투고, 조정에는 일이 많아 여기까지 파병할 틈이 없다. 비록 온다 해도 족히 두려울 게 못된다."

그러나 김윤식의 유배지 주인이었던 김응빈 등을 중심으로 창의군이 일어나 민란은 곧 진압되고 말았다. 민군에 포섭됐던 대장 최형순이 방성칠을 죽이려고 하자 이를 눈치 챈 방성칠은 창의군이 점령한 제주성을 버리고 화전마을로 달아났다. 방성칠은 그해 3월 15일 최형순이 이끄는 창의군에 쫓겨 달아나다 몸 일곱 군데 창을 맞고 죽는다.

당시 민당이 제주성을 점령했을 때 김윤식은 유배인들과 함께 동쪽으로 피난한다. 일본 어선을 이용해 섬을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피난길 도중 김응빈의 형인 조천리 김응전 집에 머물 때는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창의군 거사 계획이 논의된다. 성산읍 시흥리까지 피난 갔던 김윤식은 제주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김응전 집에 머문다. 조천에는 이때만 해도 기와집이 즐비했지만 방성칠난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김응전의 집만은 무사했다. 김윤식의 말처럼 평소 민심을 얻어서 난민이 모두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던 그 집은 아직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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