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포커스]관덕정 광장 어떤 곳인가

[한라포커스]관덕정 광장 어떤 곳인가
역사·문화의 중심무대
  • 입력 : 2017. 02.13(월)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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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원도심 상징 공간


관덕정 광장은 과거 제주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역으로서 원도심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원희룡 지사는 2014년 2월 6·4지방선거를 앞두고 관덕정 앞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관덕정은 제주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고건축으로서, 조선초기인 1448년(세종 30년) 제주목사 신숙청에 의해 창건됐다. 1480년(성종 11)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차례 수리를 거쳤다. 관덕정은 제주민들의 광장으로도 활용됐다.

제주학연구센터장 박찬식 박사는 '제주의 고건축 관덕정 새로 읽기'에서 관덕정의 역사와 제주민들의 광장으로서 관덕정을 조명한다. 관덕정의 '관덕(觀德)'은 '활을 쏘는 것은 훌륭한 품격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문장에서 따온 말이다. 무예를 익혀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관덕정과 목관아가 연접한 도로는 과거 구한말까지도 제주도 최고의 광장으로 활용됐다. 이는 관덕정이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장소였기 때문에 넓은 공지가 필요함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탐라순력도'에'에 따르면 목사가 참석하는 대부분의 행사나 연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말기에는 민란의 장두가 관덕정을 장악해 포악한 향리를 처단했고, 1901년 이재수란 때에는 관덕정 마당에서 다수의 천주교도가 민군에 의해 살해되기도 한 역사의 현장이다. 4·3으로 가는 길목에서 1947년 3·1절 시위 및 발포가 일어난 현장이기도 하다.

근대 제주도 최초의 오일시장이 이곳에서 열려 많은 인파가 북적였다.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입춘굿 놀이가 열렸던 민중 연희의 처소이기도 했다. 현재의 관덕정 및 목관아의 앞 마당인 중앙로에서 서문에 이르는 도로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제주섬 최대의 광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신작로 도로로 전용돼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길은 자동차의 소통을 위해 넓혀졌다. 관덕정과 목관아에 어울리지 않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권위적인 건축물들도 들어섰다. 강시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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