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의 스피시즈 한라산엔시스 탐사(38)] 제1부 아득한 기억, 알타이-(38)바늘두메자운

[김찬수의 스피시즈 한라산엔시스 탐사(38)] 제1부 아득한 기억, 알타이-(38)바늘두메자운
수 ㎞ 언덕 가득 덮고 있는 바늘두메자운 군락 ‘장관’
  • 입력 : 2017. 12.10(일) 19:00
  • 조흥준 기자 chj@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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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두메자운 군락. 사진=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서연옥·송관필·김진·김찬수

잎많은 두메자운 유사 종으로 콩과 속해
1831년 분게·로조프 학자 첫 탐사 채집
한국인에 의한 첫 채집기록으로 될 듯

김찬수 박사

갑자기 좁아지면서 양쪽 절벽이 급해지는가 싶더니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자동차 엔진소리가 잦아들었다. 협곡을 거의 빠져 나왔음을 직감했다. 시야가 확 트이면서 긴장이 풀린다. 이제는 협곡이라기보다 양쪽으로 멀리 그리 높지 않은 산맥이 둘러싸는 형세가 펼쳐진다. 좀 편안히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유를 가지고 차창 밖의 식물들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마치 동그란 쿠션 같은 꽃 무더기가 듬성듬성 보이는 게 아닌가. 갈 길이 급하기야 하지만 이건 놓칠 수 없지. 항상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언제 차를 세우느냐는 건 시간을 얼마나 줄이면서 그 식물의 특성을 최대한 많이 관찰하느냐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차하고 시간을 놓치면 다시는 그 신기한 꽃을 보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이 이 길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끝없는 꽃밭! 드디어 나는 차를 세웠다. 난 지금껏 이렇게 같은 종이 넓게 피어 있는 장관을 본적이 없다. 보이는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찼다. 길 양쪽에는 높이 100~300m 쯤 되어 보이는 산들, 아니 언덕으로 되어 있다. 그 사이의 폭은 얼추 1~2㎞다. 이런 지형에 수 ㎞ 거리를 이 꽃이 덮고 있는 것이다. 이번 탐사에서 설령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 꽃 쿠션은 직경이 20㎝에서 큰 것은 60㎝ 정도였다. 높이는 15㎝ 내외다. 이 일대에서 이보다 큰 식물체는 없다. 가릴 것이 전혀 없는 곳이다. 이보다 큰 물건이라곤 암석들뿐이다. 이 식물체는 100㎡에 10개체 내지 100개체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 꽃은 진한 빨강에서 분홍을 거쳐 흰색까지 변화가 많았다, 이러한 꽃 사이로 멀리 몇 마리의 낙타가 풀을 뜯는 게 보였다.

다양한 꽃 색깔의 바늘두메자운.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난 장관을 누가 또 봤을까? 누가 이 꽃을 처음 봤으며, 우리나라에는 소개 된 적이 있을까? 이 식물은 바늘두메자운(옥시트로피스 아키필라, Oxytropis aciphylla)이라는 종이다. 계곡을 통과하면서 봤던 잎많은두메자운과 가까운 친척으로 콩과에 속한다. 학명에 들어 있는 아키필라가 '바늘모양의 잎을 내는'이라는 뜻이니 우리말 이름으로 바늘두메자운으로 했다.

이 식물은 독일인이면서 에스토니아 식물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본 레데보우어(1786~1851)가 1831년 자신이 저술한 알타이 식물지 3권에 학명을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그러면 이 식물을 처음 현장에서 관찰하고 채집한 사람은 누굴까? 누가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탐사했단 말인가? 이곳에서 바늘두메자운을 처음 채집한 사람은 분게와 로조프라는 학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1831년 이 일대를 탐사했는데 이 때 다른 식물들과 함께 이 종도 채집한 것이다. 1841년 타타리노프, 1880년 프르제프, 1926년 리스, 1931년 포브 등이 그 뒤를 이어 채집했다. 이후에도 이 식물에 대한 채집기록은 꽤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자에 의한 채집기록은 전무한 상태로 이번 탐사는 한국인에 의한 첫 채집기록이 되는 것이다.

알타이산맥 일대에 이 종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만날 확률은 매우 높다. 그가 어느 길을 따라 탐사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장관을 이룬 집단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탐사대는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바늘두메자운 군락 내부에 들어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을 채집한다는 건 탐사지역, 탐사루트, 탐사시기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탐사지역과 탐사루트를 잘 선정했다 해도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결코 완전한 식물체를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글=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서연옥·송관필·김진·김찬수

아시아 식물탐사 선구자 ‘분게’

분게(알렉산더 게오르그 폰 분게, Alexander Georg von Bunge, 1803-1890)는 러시아의 독일계 식물학자다. 즉 독일국적이면서 러시아 시민권자다.

그는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탐사한 최고의 과학자라는 찬사가 뒤따른다. 그는 제정러시아의 소수계 독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데오도르는 18세기에 동 프러시아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약사였다.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도르파트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카잔에서 식물학 교수로 활동했다.

1835년에 도르파트대학으로 돌아와 1867년까지 식물학을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식물학 학술지 린나에아(Linnaea)에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술활동을 통해 할레대학의 식물학자인 레온하르트 폰 슐레츠폰달(Diederich Franz Leonhard von Schlechtendal)과 교류하게 된다. 이런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식물탐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까지 도르파트대학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그 이후 에스토니아 식물상을 조사면서 그의 말년을 보낸다.

1826년 레데보우어와 안톤 레이어와 함께 키르기즈 스텝과 알타이에 대한 탐사를 떠났는데 이 탐사야말로 그 자신의 과학적 성취는 물론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식물상에 대한 윤곽이 잡히는 계기가 됐다.

1830년부터 31년까지는 시베리아를 거쳐 베이징까지 탐사를 했는데 이 때 몽골 식물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1832년에도 계속해 중국 일대를 조사하고 알타이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당시 알타이 동부지역에 대한 탐사를 집중한 것으로 나타나 지금 우리 탐사대가 지나고 있는 이 일대의 어느 길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 1857년부터 이듬해까지는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식물탐사를 했다.

그는 식물탐사만을 한 게 아니라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열당과의 분게아속을 비롯해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수많은 식물들이 후배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자신이 직접 발견해 새롭게 이름붙인 식물도 800여종이 넘는다. 한라산에 분포하고 있는 식물 중에서도 산달래, 조뱅이 등 많은 종이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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