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우의 한라칼럼] 남의 것도 중요한데…

[송창우의 한라칼럼] 남의 것도 중요한데…
  • 입력 : 2018. 11.27(화) 00:00
  • 김경섭 수습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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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일 하기에는 춥기도 하고 지난 며칠 사이 수확한 도라지를 팔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그림 그리는 친구 작업실을 찾았다. 농사를 짓기 전부터 말이 통하는 친구였고, 참으로 많이 찾던 작업실이었지만 오랜만이어서 조금은 어색했다.

작업실에 들어서면서 이 친구의 넓어진 작업시야에 놀랐다. 우선 부탁한 것을 처리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작품 눈에 띄었다. 특히, 한라산 판화는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답답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가슴이 뻥 뚫리기에 충분했다. 한라산 백록담과 정상의 서북벽과 남북을 타고 내려오는 웅장한 산줄기와 부둥켜안아 울부짖고, 솟구쳤다 가라앉으면서 이별의 슬픔과 만남의 기쁨을 함께 하며 태평양으로 달리는 계곡들의 원시모습이 흑과 백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여백의 미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정밀할수록 묘사된 그림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것이기에 이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다.

이러한 감정 때문인지 속물근성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런 작품은 얼마 하느냐고 묻자 한지 값만 14만 원 정도 한다며 웃을 뿐이었다. 이 친구의 혼과 노력과 정열이 묻어있는 작품과 3년 동안 재배한 도라지 가격에 올려놓고 말았다. 대체 도라지 얼마나 팔아야 이 작품 하나를 살 수 있을까, 그럼 일당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이 친구처럼 작품이 팔지 못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조잔함이 떠오르는 건 잘못된 일일까. 매일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왔다가 또 같은 길 위로 다시 같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의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것도 소중한 것이라고 여긴다.

허나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는 부류들도 우리와 같은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을 하지 않고 아버지나 조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아 아무 것도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자본가나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환산하며 온갖 방법으로 돈을 벌어 이른바 속된 상류사회에 진입하거나 하려는 자들은 자기 것 이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삶과 경험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며 다양하게 펼쳐지는 사회에서도 적용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기주의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덕목으로 삼는 이타주의에 고민하지도 않는다. 물론 남에 대해서도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밖에서는 자기의 주식과 재산의 가치에 대한 생각과 자기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완전한 사유재산제의 실현 그리고 권력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닫힌 울타리에서는 설령 자식의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핀잔을 듣거나 지적을 받게 되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폭력이든 돈으로 굴복시키든 반드시 복수하는 훌륭한 아버지이자 근엄한 모습을 한 교육자다. 또한 순결을 부르짖는 도덕주의자이지만 집밖으로 나가면 위선자이며 정치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젊은 여성에게는 난봉꾼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분석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들에게는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 스스로 빛나는 작품은 감동이 아니라 과시를 위한 가격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나는 이들의 악행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저항해야 한다. 우리들의 땀과 눈물이 없으면 그들도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의 것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송창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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