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만덕할망 객주집 원석바위를 찾아

[문영택의 한라칼럼] 만덕할망 객주집 원석바위를 찾아
  • 입력 : 2020. 11.10(화)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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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는 혜일스님, 어승마노정, 만덕할망을 3기(奇)라 부르기도 한다. 만덕할망은 무엇을 기특하고 기적적으로 행했기에 이런 말이 전해지는 걸까. 평소 필자는 의녀 김만덕을 은광연세 만덕할망이라 부른다. 설문대할망, 조왕할망, 삼신할망, 할망당 등에 견주며 만덕할망이라 친근하게 칭송도 한다. 1840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할망의 기특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은광연세(恩光衍世) 라는 편액을 후손인 김종주에게 선물했다. 은광연세란 은혜로운 빛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다 라는 의미란다.

만덕할망의 객줏집이 있었던 건입동 금산공원 일대는, 가파른 절벽과 바위 그리고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산수벽이라 불렸다. 1736년 이곳 경관에 반한 노봉 김정 목사는 바위 마다 이름도 짓고 각명(刻銘)도 했다. 병풍을 세워놓은 것과 같다 해 바위에 병(屛)자를 붙인 것이다. 중장병(中藏屛), 호반병(虎班屛), 용린병(龍鱗屛) 등. 매계 이한진도 이곳을 영주십경 중 산포조어라 칭했다.

지금은 김만덕 객줏집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근무하는, 오래전에는 석비회(石扉會) 회장을 지낸 고성칠 님은, 건입동의 역사문화에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다. 그는 내게 만덕할망 객줏집에 있던 바위가 제주동초등학교로 옮겨진 사연을 들려줬다. 큰뜻이라는 글자가 새긴 커다란 바위가 바로 그 바위란다. 동네 어른들로부터 만덕할망 객줏집 뒤편의 바위동산 얘기를 들으며 자란 그는, 만덕 객줏집의 원래 위치는 제주 최초의 발전소가 1926년 세워졌던 자리로, 지금의 한전변전소가 있는 바로 그 자리란다. 그곳 한 켠에는 만덕할망 객줏집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전후 양씨할망(양옥순)이 살았던 옛 객줏집 앞은 바닷가 였고, 바닷가 건너편에 고성칠 님네 집이 위치했었다. 그러다 1927년 8월의 대홍수로 김만덕기념관 근처로 휘돌아 흐르던 산지천은 지금의 방향으로 물길을 새로 냈다 한다. 2000년 들어 건입동사무소 아래로의 급경사 지역을 관통하는 임항로를 건설하면서 금산수벽에도 커다란 지형변화가 생겼다. 만덕객줏집을 둘러쌓고 있던 병풍바위들은 허물어지고, 일부는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에 금산의 병풍바위들을 잘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마을 유지분들은 석비회 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대부분이 제주동교를 졸업한 회원들은 객줏집 병풍바위를 모교에 기증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학교에서도 (당시 교장 부영삼) 큰뜻이라는 교훈을 바위에 새겨, 2006년 5월 제막식도 가졌다. 바위를 옮기고 글자를 새기는 데는 이승화 님의 역할이 컸다 한다. 그분은 2005년에도 교문에 돌하르방 2기를 기증했다.

1794년 갑인년 전후 살인적인 흉년의 실상을 보았던 만덕할망은 구휼미를 사들여 나라도 구하지 못한 도민들을 살려냈으니. 200년이나 제주섬에 내려졌던 출륙금지령 속에서도 정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제주바다를 건너 한양과 금강산을 둘러보기도 했던 불세출의 여인 김만덕. 시대를 앞선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여인이자, 만가지 덕을 베푼 제주섬의 영원한 만덕할망을 떠올린다. 증언으로 전하는 만덕할망 객줏집 원석바위는, 기록 이상의 유물유적으로 자리매길할 수도 있기에 증언자들의 실명도 여기에 적는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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