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을묘왜변 현장을 가다 3] (2)조선전기 왜구와 제주의 방어체계

[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을묘왜변 현장을 가다 3] (2)조선전기 왜구와 제주의 방어체계
왜구 침입 이어지면서 제주의 독특한 방어체계 구축
  • 입력 : 2022. 08.23(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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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화북성조 : 순력의 첫 장면으로 1702년 10월 29일 화북진성을 방문한 이형상이 성을 지키는 성정군의 훈련을 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을묘년 왜구가 이곳 화북을 통해서 침입해왔다.

[한라일보] 조선 전기 제주 을묘왜변과 관련해 왜구의 대응과 방어체계 정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제주가 처한 대내외적 입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즉 제주가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이라든지, 토착세력들과 지방관의 역할, 군사시설의 현황 등 여러 면에서 봐야 하기 때문에 왜구 침입의 시작인 고려 후기부터 시선을 옮겨 보겠다.

제주는 고려 후기에 오면서 왜선과 중국 상선의 왕래가 빈번한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각돼 갔다. ‘고려사’의 원종 원년의 기록을 보면 "제주는 해외의 거진(巨鎭)으로 송나라 상인들과 왜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왕래하는 곳이니 특별히 방호별감을 파견해 비상사태에 대처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왜구의 침입이 많아 이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구축해야 했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지방관 파견에서도 다른 지역과는 다른 차별적인 인사정책이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인 해적을 통칭한다. 제주에서만도 고려 충숙왕부터 을묘왜변이 일어났던 조선 명종까지 약 250여년간 43차례에 걸쳐 확인되는데, 육지부의 침입까지 감안한다면 국가의 고질적인 국방 문제였다.

탐라순력도 내 한라장촉

고려시대 제주의 대표적 침입이라면, 우왕 2년(1376)에 왜구 600여척이 온 섬을 침략하기도 했고, 우왕 3년(1377)에 200여척의 왜선이 침범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런 기록에도 불구하고 실제 왜구에 대한 방어시설 구축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충렬왕 당시에 ‘탐라 등의 요해처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를 파견하고 봉수를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 수라든가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항파두리성과 환해장성은 삼별초와 관련된 방어시설이다.

조선 초기에 와서도 왜구에 대한 문제해결은 병선을 제주에 추가로 배치하는 정도였다. 세종 11년(1429)부터 연해 및 연안 지역에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성곽 축성이 이뤄지는데, 제주에서는 세종 21년(1439)에 본격적으로 방어 시설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안무사의 보고내용을 보면 목사와 현감이 지휘하던 3읍성과는 별도로 군인들이 주둔했던 방호소라 부르는 9개의 진성에 제주목 소관에 736명과 대정현 소관 131명, 정의현 소관 299명의 마보병(馬步兵)이 배치돼 있었다. 또한 방호소가 아닌데 왜구의 정박이 가능한 곳에는 별도로 잡색군들 50~60여명 혹은 100여명까지 배치했다. 그리고 통신시설인 봉수대가 22군데가 있어 봉군 5명씩 배치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제주 전 지역을 돌며 나름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사가 무신 겸임해 행정관인 동시에 군사지휘관 역할
수령·토호세력, 도민 모두 나서 왜구 대비 방어태세 갖춰

하지만 문제는 왜구 침입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일부 방호소는 위치 문제도 있거니와 정작 유리한 교전을 해야 할 성곽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종 25년(1443) 제주안무사가 보고했던 계문을 보면, "김녕방호소에는 우도가 있고, 명월방호소에는 차귀도가 있는데, 모두 다 적선(賊船)이 침범해 들어오는 곳입니다. 정의·대정 두 현 사이에 있는 서귀 방호소는 두 현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적선이 쉽게 들어와 정박할 수 있으니, 이 세 곳에 성을 쌓아 방어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라는 보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때 9개의 방호소 중에서 먼저 김녕과 명월 2개소만 성곽이 축조된다. 대대적인 성곽축조는 중종 5년(1510) 4월에 일어난 삼포왜란 이후 그해 9월 장림목사가 진성축성에 대해 건의하면서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중종때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세종대 9개소에서 13개의 방호소로 증설되고, 수전소 역시 13개소, 봉수는 세종대 22개소에서 23개소로 정비됐다는 기록을 볼 때 비로소 중종대에 제주도의 관방시설은 크게 확충됐고, 왜구 침입에 대한 해안방어 시설이 어느 정도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그럼에도 을묘왜변 당시 왜구의 출입로였던 화북수전소는 성곽도 없이 전투에 임해야 했다. 결국 진성은 임진왜란을 거친 이후에야 성곽축성이 이루어지고 3개 읍성, 9개 진성, 25개 봉수, 38개 연대 체제로 갖춰지게 된다.

그러면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제주의 군사조직체계는 어떻게 이뤄져 있을까.

먼저 제주에는 왜구 방어를 위해서 별도의 무신 장군들을 파견하지는 않았다. 목사를 파견할 때 목사겸첨절제사(牧使兼僉節制使)라든가 안무사겸목사(安撫使兼牧使),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 등 상황에 따라 목사가 겸임하도록 했다. 제주에 정3품의 목사를 파견할 때 병조의 동의를 얻어 임명토록 ‘경국대전’에 규정했던 것이다. 즉 제주 목사는 행정관이자,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목사를 보좌하는 판관인 경우에도 전례에 따라 중군(中軍)을 겸하도록 했고, 상황에 따라 목사가 문관일 경우 무관으로 파견하기도 하는 등 문무교차해 파견시켰다. 대정과 정의 현감 역시 마정을 위해 감목관을 겸하게 하고, 진관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도록 해 군병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처럼 조선은 비상시에 목사, 판관, 현감까지 모두 전투에 들어갈 수 있는 지휘체계를 갖췄다.

오수정 제주여성가족연구원 행정지원실장

수령 지휘 아래에는 마정과 함께 읍성과 진에서 방어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주 토호세력인 좌·우도지관을 비롯해 천호, 진무, 백호를 비롯해 3읍과 방호소에 배치된 마보병(馬步兵), 왜선이 정박하기 쉬운 곳에 배치된 잡색군들이 있었다. 마병과 보병들은 군역의무자로 편성된 정병(正兵)이며 마병은 곧 기병(騎兵)으로 유사시에 말을 타고 싸우는 군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잡색군은 공사(公私) 노비와 각 소속의 정군의 군력을 돕는 봉족 등으로 별도 구성된 병졸이다.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이 화북포로 들어와 제주 주성에서 전투할 때 김수문 목사를 비롯해 군사 70명과 치마(馳馬)돌격대 등이 승전했다는 기록은 방호소에 배치된 기병들과 보병들의 활약을 전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사적 전투기능보다는 통신기능을 주로 담당했던 봉수에는 봉화가 있는 곳마다 별장, 망한과 봉군을 두어 밤낮으로 지키게 했다.

이처럼 제주는 외부요인으로서 왜구침략이 가장 큰 현안이었다. 그러기에 목사를 비롯한 수령과 토호세력, 도민 모두 왜구침략에 대한 방어태세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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