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열린 스물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에서 오희숙·계숙·기숙 세 자매가 아버지 오화국 씨의 이갸기를 증언하고 있다. 이상국기자
[한라일보] 제주4·3의 광풍에 휩쓸렸던 희생자 유가족들이 고통의 세월을 구술로 증언하며 서로의 아픔을 치유했다.
제주4·3연구소는 31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4·3, 재심과 연좌제 창창한 꿈마저 빼앗겨수다'를 주제로 스물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에는 4·3 직권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한 양성홍(76) 씨와 연좌제의 직접적 피해를 경험한 강상옥(74) 씨, 오희숙(86)·계숙(79)·기숙(77) 세 자매가 그동안의 고통을 생생히 증언했다.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은 여는 말을 통해 "4·3 75주년인 올해는 지난해 시작된 4·3보상금 지급 후 처음 맞는 추념일로 억울한 군사재판 희생자들이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 애틋하다"며 "올해 22년째 이어진 증언본풀이 마당을 통해 82명이 4·3 당시의 이야기를 구술로 기록하며 4·3이 현재진행형의 역사임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성홍 씨의 아버지 양두량 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49년 4월 경찰에 체포된 양 씨의 아버지는 주정공장에 수용된 뒤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후 행방불명 됐다.
양 씨는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던 고등학생 시절 동네 선배를 통해 연좌제를 처음 알았다고 했다. 양 씨는 "당시 선배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육지 형무소에 끌려가 희생을 당해 너는 공무원이든 은행이든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6개월가량 근무하는데 신원 조회에서 뭐가 나왔다고 하며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연좌제의 피해를 경험하고 직권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한 양성홍(왼쪽) 씨와 강상옥 씨. 이상국기자
연좌제의 사슬에 갇혀 미래가 막혀버린 양 씨는 방황의 시절도 보냈지만 열심히 살아왔고 지난 2022년 8월 30일에는 4·3 직권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았다.
양 씨는 "한 때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됐다는 생각에 원망도 많이 했다"며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떠나면서 괴로웠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소회를 전했다.
강상옥 씨 역시 취업을 하려다 신원조회에서 탈락한 아픔이 있다. 그제야 아버지의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됐다는 강 씨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관공서도 가지 않았고 길에서 경찰을 마주치면 저쪽으로 도망가 버릴 정도로 큰 트라우마를 안고 사셨다"며 "2021년에 아버지가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고 이제는 정말 신원조회니 뭐니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증언했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의 오희숙·계숙·기숙 세 자매의 아버지 오화국 씨는 제주농업학교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에 연루돼 형을 살고 해방 뒤에는 3·1절 집회로 체포돼 목표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가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온 자매의 아버지는 하룻밤을 자고 주변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말에 부산으로 피했다. 그날은 제주4·3이 발생하기 하루 전날인 1948년 4월 2일이었다.
이후 남아있던 가족들은 온갖 고난에 시달렸으며 세 자매의 남편들인 오화국 씨의 사위들까지 연좌제로 고통을 받은 이야기를 증언했다.
오희숙 씨는 "순경들이 아버지를 찾아내라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집 밖거리에 세워놓고 죽여버리겠다고 헛총을 쐈다"며 "우리는 완전 죄인 취급을 받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아픈 기억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