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눈의 사회
  • 입력 : 2024. 01.19(금)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한라일보]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는 기분이다. 눈은 일순간 정신없이 돌아가던 세상을 정지시키는 것만 같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시끄러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것을 보는 일은 여전히 경이롭다. 눈으로 보는 눈은 마치 마법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다. 하지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이 감상은 보는 이가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눈 쌓인 길을 걷는 것은 채 몇십 분이 지나지 않아 고역이 되고 만다. 힘에 부쳐 걸음을 멈추는 순간 어떤 선택지도 없을 것 같던 그 고립감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인적이 드문 눈길만큼 무서운 곳은 없었고 탄성을 불러일으켰던 숨 죽인 자연의 자태는 어느새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공포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느낀 감정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안전망 없이 하루 이상 눈 속에서 있을 수 있을까? 숙소는커녕 식량과 방한용 외투마저 없는 채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일이다.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의 원제는 '눈의 사회(Society of the snow)'다. 설원에서 인간은 과연 자신으로 생존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눈부신 공포로 둘러쌓인 고립된 사회에서 벌어진 비극과 움튼 기적의 이야기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 1972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추락 사고로 고립무원의 안데스산맥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다. 45명의 탑승자 가운데 16명의 생존자가 무려 72일 만에 구조된다. 녹지 않는 눈 속에서 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를 보듬는 이들의 절박한 매일이 설경의 장관과 함께 펼쳐진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을 통해서 그 험난한 풍경화와 촘촘한 인물화를 또 한 번 훌륭하게 선보인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비극인 동시에 기적인 실화를 차분하게 반추한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안데스 설원의 풍경이 펼쳐지는 블록버스터이자 이른바 감동 실화로 불리는 장르지만 영화는 서늘할 정도로 들뜨지 않는다.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마지막 사망자인 누마다. 16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기 직전,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생을 살아냈던 29번째 사망자 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생존자들의 여정을 함께하며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다. 생환의 감격 뒤에 남겨진 것은 앙상한 몸에 새겨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다. 몸과 마음에 각인된 눈 속의 사회는 뜨거운 물로 씻어내도 녹지 않는다.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용기와 도전으로 일궈낸 삶은 축복인 동시에 몇몇만이 공유할 수 있는 영원한 비극이고 기적으로 남겨진 감동 실화는 누군가에게는 덮어 버리고 싶은 지옥 같은 죽음의 기록이다. 영화는 이 균형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삶과 죽음을 함께 둔다. 그것이야말로 '눈의 사회'임을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 놓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715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