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우연과 안도
  • 입력 : 2024. 05.03(금) 00:00  수정 : 2024. 05. 04(토) 23:08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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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행자의 필요'.

[한라일보] 홍상수 감독의 서른 한 번째 영화 [여행자의 필요]는 그의 다른 작품들 만큼이나 그 제목을 내내 곱씹게 만든다. '여행자'는 상태일까 혹은 형태일까, '여행'이란 움직임은 전이일까 또는 변이일까. 그렇다면 어찌 되었건 일상의 바깥에서 다시 테두리의 안으로 향하는 여행자라는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렇듯 어딘가의 누군가, 누군가의 무언가, 무언가의 어디쯤을 내내 궁금하게 만드는 느슨한 수수께끼 같은 영화가 [여행자의 필요]다.



홍상수 감독이 직접 쓰는 영화 소개는 다음과 같다. '어디서 온지 모르는 이 사람은 불란서에서 왔다고 하고, 어린애 피리를 근린공원에서 열심히 불고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어떻게 살지 몰라해 불어를 가르쳐보라 권했고, 그렇게 두 명의 한국여자들에게 선생이 되었습니다. 땅에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고, 돌에 누워있는 걸 좋아하고, 힘이 되는 때 순간 순간을 비언어적으로 바라보려하고,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삶을 살려고 애씁니다. 그래도 사는 건 변함없이 고되고, 매일 막걸리에 의존하며 조금의 편안함을 얻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이리스는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통해 돈을 벌고 낯선 사람들과의 시간을 익숙하게 만들며 주어진 시간과 펼쳐진 공간을 마주하는 이다. 산책과 막걸리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지만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 사람이 이리스다. 이리스를 둘러싼 사람들을 그녀와 유형, 무형의 것들을 주고 받는데 그것들은 언어 교습이기도 하고 술잔이기도 하며 때로는 시간과 마음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이리스는 선생님이고 술 친구이며 동시에 이방인인 여행자다. [여행자의 필요]에는 프랑스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가 등장한다. 프랑스인 이리스가 만나게 되는 한국인들과의 교집합은 영어라는 언어가 되지만 의사 소통의 가능 여부가 온전한 쌍방의 교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통의 언어는 의미를 구체화해서 건네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채로운 디테일을 뭉뚱그려 놓는 무뚝뚝한 정답으로만 기능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정확하게 주고 받는 교환이 반드시 타인의 어딘가로 다가가는 지름길은 아니다. 이리스는 타인들과의 교환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호기심은 시간의 바깥과 공간의 이면 모두를 향하는 촉수다. 하지만 그녀는 더듬을 뿐 설명하지 않는다. 정답을 찾는 일은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이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어쩌면 질문의 호흡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 같다.



[여행자의 필요]는 지도에 그려진 가이드 라인에 생략된 것들의 흔적을 천천히 살피는 영화다. 홍상수 감독은 도착지로 향하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여정의 순간마다 여행자에게 당도하는 기운과 기분들을 놓치지 않으려 멈추는 착지를 반복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이리스의 세계에는 화살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스는 교과서 없이 언어를 가르치고 악보 없이 피리를 연주하고 오늘 마실 술의 양을 정해 놓지도, 내일 떠날 곳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그녀가 스스로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며 마주하는 것은 생경함 자체의 매력을 음미하는 일이다. 시간이 오래 필요한 일들, 한달음으로는 불가능한 일들, 이를테면 시의 행간 속에 몸을 담그고 마음 속 깊은 곳의 느낌을 마주하는 순간들 말이다.



많은 이들이 염원하는 보물은 삶의 곳곳에 산발적으로 숨겨져 있고 그 광채를 발견하게 하는 빛은 우연하게 쏟아진다. 번쩍이는 황홀한 순간이 어느덧 사라진 곳에 누군가를 쉬게 할 그늘이 생긴다. 그 우연과 안도의 반복 이야말로 누군가의 여행을 지속하게 만드는 유일한 필요가 아닐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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