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85] 3부 오름-(44)영실은 돌 계곡, 영주산은 물 혹은 바위들이 있는 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85] 3부 오름-(44)영실은 돌 계곡, 영주산은 물 혹은 바위들이 있는 오름
영실, 신령스럽지도 신선이 사는 곳도 아니다
  • 입력 : 2024. 06.11(화)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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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谷)은 삼한어와 가야어 ‘실’, 고구려어 '둔'으로 읽어

[한라일보] 영실은 병풍 같은 주상절리 용암이 두드러진 지형이다. 능선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늘어서 있어서 더욱 장관을 이루고 있다. 계곡엔 연중 물이 흐른다. 탐방로도 잘 만들어져 많은 이들이 몰린다. 그러나 예전에는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 기도처로 알려졌었다. 영실이란 지명은 연구서나 관공서 출판물에서나 신선이 사는 곳 또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 고대인들은 과연 이곳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꼈을까? 한자가 들어오기 전엔 뭐라고 했을까? 신령이 사는 곳이라거나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장소성을 이름에 담았다면 건물도 아니고 방도 아닌데 영실(靈室)이라면서 집 혹은 방을 의미하는 한자 실(室)이라고 했을까? 이 한자 때문에 주저 없이 신령이 사는 곳이라고 했을 것이다.

영실(靈室 혹은 靈谷)의 어원은 신령스런 곳이 아니라 돌로 이루어진 골짜기를 말한다. 김찬수

영실 지명은 역사적으로 靈谷(영곡), 靈谷洞(영곡동), 靈室(영실), 瀛谷(영곡), 瀛室(영실) 등으로 나타난다, 이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곡=영실'이라는 구조다. 그러므로 '곡=실'의 등식이 성립한다. 그런데 谷(곡)이란 한자는 골 혹은 골짜기를 뜻한다. 그렇다면 실(室) 역시 골 혹은 골짜기여야 한다. 고어에서는 실제로 실과 곡은 같은 뜻을 가진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 장육존상에 대한 대목에 '실포(絲浦)는 오늘날의 울주 곡포(谷浦)를 말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1674년에 나온 조선의 문신 이식의 문집인 '택당집(澤堂集)'에도 곡(谷)은 실(室)이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영실은 돌(石)로 이루어진 골짜기, 신(神)과 관련 없어

이 곡(谷)이라는 한자는 고훈(古訓)이 '실'이었으며, 달리 실(室), 실(實)로도 표기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방식으로 '골 곡(谷)'이라 하는 것처럼 고대에는 '실 곡(谷)'이라고 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곡(靈谷)이라 쓰던 영실(靈室)이라 쓰던 읽을 때는 영실이라 읽는다. 이런 지명은 삼한어, 가야어, 백제어, 신라어에 공통이다. 다만, 고구려어에서는 둔(屯) 혹은 단(旦)이라 했다. 이 부분은 다음으로 미룬다.

여기서 또 하나의 글자 영(靈)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영'이란 앞 회에서 영아리(靈-), 영천오름(靈泉-)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훈이 '돌'이었다. 즉, '돌'이라 쓸 것을 靈(령)이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谷(곡)'이라 쓰고 '실'이라 읽는 것과 같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막연히 '산'을 지시하는 글자가 아닐까 정도로 생각한다면 같은 발음인 瀛(영)을 잘못 쓴 거겠거니 하고 오해할 수도 있다. 고전에 瀛谷(영곡) 혹은 瀛室(영실)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쓰인 瀛(영)은 전설상의 산 이름을 표현할 때 쓰는 글자다.

영(靈)이란 '돌'임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다만 영아리(靈-), 영천오름(靈泉-)의 예에서처럼 물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靈)은 '돌'로 읽을 뿐 지시하는 뜻은 다양하다. '돌'은 '돌'로 음운변화를 거치면서 돌(石), 돌(渠, 溝; 개천, 도랑), 달(月), 옥(玉), 진(珍) 등의 뜻으로 파생했다. 영실이라는 지형은 주상절리와 바위가 두드러진 곳이다. 그러면서 연중 물이 흐른다. 따라서 영실(靈室 혹은 靈谷)은 돌(石)로 이루어진 골짜기를 말한다. 고대인들은 신령스럽다기보다 이런 지형적 특징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영주산 '돌찾궤' 바위, 영주산은 돌마루의 한자어 영지(靈旨)에서 기원한다. 돌이 있는 등성마루라는 뜻이다. 김찬수

영주산, '영모루'라는 뜻의 영지(靈旨)를 영주(瀛洲)로 오해

지명에 '영'자가 들어있는 오름으로 영주산이 있다.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 18번지다. 이 오름의 지명 유래도 산봉우리에 아침 안개가 끼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등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고전에 영주산(瀛洲山), 영지(瀛旨) 등으로 나온다. 오늘날 지도에는 영주산(瀛洲山)으로 표기했다. 지역에서는 마르 혹은 영머리라 부른다. 이런 영향으로 영지(瀛旨)라는 표기도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旨)는 '모로 지'로 쓴 것이다. 오늘날엔 이 글자를 '뜻 지'로 사용하지만 1576년에 나온 한자 입문서 '신증유합'이라는 책에는 '모로 지'로 나온다. 긴 등성마루를 한 이 오름의 모양을 반영한 이름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이 오름의 지명은 지역에서 영모로라하고 '모로 지'를 동원해 영지(瀛旨)라고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기록자들이 '영지'라는 발음에서 '옛날 신선이 살았다는 동해(東海) 속의 신산(神山)'이라는 영주(瀛洲)를 떠올려 영주산(瀛洲山)이라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瀛)의 출처는 영실(靈室)을 영실(瀛室)이라 한 것처럼 영(靈)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瀛旨)는 영지(靈旨)에서 출발한 것이다. 서쪽을 흐르는 내를 1703년 '탐라순력도'에 영천천(泉川)으로 표기한 것이 그 증거다. 영(靈)과 영()은 같은 글자다. 서귀포시 상효동의 영천오름 지명에서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주산(瀛洲山)은 영천악(靈泉岳)이었을 것이고 고대인들은 '돌세미'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달리 볼만한 단서도 있다. 지역에서는 바우오름이라고도 부른다는 점이다. 분화구의 동쪽 안 사면에는 대형의 용암 바위들이 있다. 이 바위들은 인근의 오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경관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바우오름이라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명 중 영(靈)은 '돌(石)'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영주산은 인근의 영천천에서 온 이름으로 샘물이 있는 오름이거나 분화구에 있는 거대한 바위들에서 기원한 '돌오름'에서 온 지명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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