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81)Mazeppa*-김안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81)Mazeppa*-김안
  • 입력 : 2024. 08.20(화) 01: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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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ppa*-김안




[한라일보] 나는 듣는다,

마지막 우편물에 적힌 주소지에서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 하얀 국수를 삶고 계란을 풀고,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고,

누군가 둥근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환해지는 뱃속.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릇,

끊긴 기타 줄처럼 뒤엉킨 국수,

깨진 거울,

선생님,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습니다만……

듣는다,

변명을 시작하기 위한 음소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의 이름을.

*'Mazeppa' 부분

삽화=배수연



마제파는 우크라이나 독립 영웅의 이름이며, 이 사람의 드라마틱한 서사는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렵기로 유명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에 마제파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 예의 하나이다. 김안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누구인지를 알 수 없고 등장하는 사물들 또한 어떤 체계나 질서를 갖지 않아 문장은 완성될 수 없을 것 같은, 다만 그 자체로만 성립되는 듯 흘러간다.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다는 정도가 명료할 뿐이다. 낱낱의 비루한 이름들이 출몰하는 시인의 현재는 영웅의 서사완 달리 매우 연약하고 평범한 세계이며 오히려 영웅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파란과 피폐함에 맞추어져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용케 끊어지지 않고 모여서 하나의 묘한 구조를 이룬다. 청자는 그것을, 내면의 파장으로 듣는다. "나는 듣는다,"로 시작되는 이 시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화자가 인식하는 소리인 '음소'의 지휘 아래 놓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이 시(詩)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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