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1)중문동 하원마을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1)중문동 하원마을
절경 따라 역사의 향기 가득한 양반고을
  • 입력 : 2024. 08.23(금) 03:00  수정 : 2024. 08. 25(일) 11:08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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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오백장군 혹은 오백나한이라 부르는 기암절벽 영실기암(해발 1600m)이 지적도상으로 하원동 산1번지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달려 내려와 절벽을 이룬 머내바당까지 온통 역사의 향기가 서린 마을. 영실의 정기와 혈맥이 흐르는 줄기 위에 펼쳐진 자연경관과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은 탐라국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한 영향에서일까. 영실 부근 존자암에서부터 법정악 부근 법정사, 탐라대학교 인근 원만사, 그리고 천년고찰 법화사에 이르는 역사적 사찰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불교와 연관성이 깊은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상왕 장보고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는 법화사. 설령 장보고가 법화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그냥 전설에 불과하다고 치더라도 그 시대에 해상세력의 거점으로 섬 제주의 어느 곳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해류와 같은 종합적인 항해술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만하다.

강창주 마을회장

1990년대에 법화사지(제주도 기념물 제13호) 발굴과정에서 타임캡슐에 가까운 명문기와가 발견됐다.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에 중창을 시작해서 10년 후에 마쳤다는 기록이다. 중창이라고 함은 그 이전에도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원나라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통치기구 탐라총관부 99년 동안에 있었던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동북아 정세로 보아 이 지역은 탐라국의 인구 밀집 지역이기에 법화사라고 하는 거대한 사찰을 중심으로 이 섬이 탐라총관부 시기에도 지배세력이 활발하게 해로를 활용해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롯이 '천년의 역사 하원마을'의 한 줄기가 된다.

주민들이 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하원(河源)이라는 마을 명칭에 모두 물이 들어가 있다. 수량이 풍부해 논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섬 제주에서는 보기 힘든 미작지역이었다. 법화사 내에 법화수는 그 옆 원두물과 함께 물맛이 좋고 시원하기로 제주에서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1985년까지 하원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법화수를 사용하였다. 지명이 광덕코지라고 하는 원만사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일품이다. 말과 뜻 그대로 약이 되는 약수(藥水)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미년 삼일운동보다 5개월 먼저 400여 명이 무장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사건이다. 해발 680m 법정악 능선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제주도 기념물 제16-1호)는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민족혼의 성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강창주 마을회장에게 하원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했다. "천년을 다듬은 착한 심성!"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들어온 이야기를 응축해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제주어로 '몹씬 사름은 살지 못허는 마을이 하원이라.' 아무리 거친 성격의 사위나 며느리가 하원리에 들어와도 살다보면 동화되어 유순한 성격으로 바뀌어버린다는 예의범절 마을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변 마을 사람들도 모두가 인정하는 자부심이라고 하니 양반고을이라는 칭호가 하루아침에 이룩되는 것은 아니리라.

마을 현안 중에 가장 뜨거운 것은 1990년대 탐라대학교 설립을 위해 마을공동체가 보유하고 있던 목장용지를 교육부지로 한정해 쓸 것을 조건으로 양도하던 당시에 공감대는 '소를 키우던 곳에 사람을 키우자'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곳을 산업용지로 변경해 민간위성 사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행정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통적으로 선비마을이었던 학문숭상의 문화에 전혀 결이 다른 사업이 등장하면서 마을공동체는 비장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한다. 방법은 명쾌하다. 하원마을문화의 전통을 존중해 10만 평에 가까운 교육용지를 산업용지로 바꾼다면 그 정도 면적의 목장용지를 교육용지로 다시 전환시켜 달라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며 마을공동체의 생존권 공간이었던 목장을 교육 목적으로 양도했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예술가>



400년 팽나무 그늘 아래서
<수채화 79cm×35cm>

뿌리 깊은 마을 하원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나무가 필요했다. 그것도 8월의 뙤약볕 아래 그늘을 드리운 모습. 마을 어르신들이 더위를 피해서 돌방아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속도를 그리려 했다. 400년의 풍상을 이겨낸 자태는 갖은 굴곡이 모두 드러나 있다. 보호수가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 공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회화적 관점에서 근경은 그늘이며 원경은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극명한 명도대비 공간이다. 소박한 농촌마을 풍경이거니와 사람과 자연이 이렇게 상황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상이라 여겨지기 때문. 저 어르신들이 80대라면 나무 나이는 다섯 배 많다. 뒤집어 생각해서 저 나무가 80세라면 할머니들의 나이는 16살 아가씨다. 나무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

50대에서 60대 정도 나이의 분들의 회고담은 저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이 얼마나 무서운 공간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나무 그늘 사랑방(?)에 담소를 나누는 상황에서 지나가게 되면 그 아이의 가족에 대해 안부를 묻거나 그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므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다니지 아니하면 저 팽나무 아래 공론의 장에서 엄한 입방아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 아이의 행실에 대해 비판적이 소문이 저곳에서 돌았을 경우 집에서 부모님께 혼나게 매를 맞으니 참으로 무서운 심판대이기도 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마을 전체가 교육공간.



법화사 옛 주춧돌의 의미
<연필소묘 79cm×35cm>

지름 80cm 정도의 현무암 주춧돌이 탐라국과 원의 지배권을 행사하던 탐라총관부 시기에 있었다면 구조계산에 의해 저 주춧돌 위에 서있던 기둥의 굵기가 나오고 그 기둥이 받치고 있던 하중의 양에 따라 건물의 크기가 방정식을 풀 듯이 미지의 값들이 드러나게 된다고 한다. 그 당시 다른 어떤 지역의 왕궁 못지않은 규모의 법당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는 저 주춧돌은 이 섬의 지난날 역사 중에 어떤 권위와 위엄을 가진 건물이 필요성과 관련한 숱한 사연들을 응축해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다. 저 주춧돌에 눈이 있다면 바라보고 기억하는 장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여 천년 역사 하원리의 상징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그 장면들 중에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미타삼존불이 명나라로 떠나는 모습은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일 것이다. 원의 지배 탐라총관부 99년 어느 시점에 원 황실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미타삼존불상이 법화사에 모셔지게 된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시 제후국이었던 조선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서 탐라총관부 관할 지역 법화사의 미타삼존불상이 황실과 관련 있는 영험한 불상이라서 명나라 황실에 소유권이 있음으로 반환할 것을 명령하니 삼존불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 전말을 기억하고 있는 당시 법당의 주춧돌을 그리게 된 것은 한반도 고려의 역사에 기록할 수 없던 탐라총관부 시기 하원리 지역과 법화사의 위상을 밝히고자 하는 염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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