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올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타인의 삶을 읽고 본 주제가 있다면 '돌봄과 노동'에 대한 것이다. 물리적 나이로 오십을 향해 가고 있는 지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나는 미혼의 독거남이고 부모님은 여든을 향해 가고 있다. 차로 두 시간 남짓 거리의 부모님 댁에는 고양이 두 마리와 개 한 마리가 함께 산다. 동생 부부는 4인 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내가 사는 곳에서도 부모님이 사는 곳에서도 차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살고 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한 달에 두어 번 부모님 댁에서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계절을 함께 지낸다. 조카들이 쑥쑥 자라는 것 이외에는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올 여름 부모님 댁에 있던 개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났다. 열 살 정도 되었고 그에게도 노화가 찾아올 즈음의 일이었다. 무더운 여름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의 공백이 생겼다. 짐작 가능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 가는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누군가의 유한함에 닿는다는 것을 실감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든 순간이 이별 앞의 시간 같았다. 더 큰 걱정은 어떤 파도가 덮쳐올 지 짐작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동안도 크고 작은 병마들이 가족의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갔기에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가지 않는다면? 하나의 삶 위에 눌러 앉거나 혹은 가져가 버린다면?
영화 [허들]은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고등학생 서연(최예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서연은 촉망 받는 허들 유망주로 실업팀 입단을 꿈꾸며 바지런한 일상을 살아가던 중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고 소식을 듣게 된다. 대형 트럭 운전수인 아빠가 도로에서 뇌졸증으로 의식을 잃었다는 믿기지 않는 비보가 그것이다. 아직 10대의 나이에 불과한 서연은 순식간에 집안의 가장이자 병석에 누운 아빠의 보호자가 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서연 앞에 불행이 높은 파도처럼 연이어 덮쳐온다. 어떤 허들이든 숨을 고르고 집중하면 넘을 수 있었던 그에게 운동장을 벗어난 광야의 삶은 혹독하기 그지 없다. 연습도 예선도 없이 삶의 결승선 앞에 선 기분으로 서연은 삶과의 사투를 이어간다.
[허들]은 가족돌봄청년의 비정한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쪽을 택하는 영화다. 영화 속에는 온기로 이어진 감동의 순간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없다. 애정관 관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돌봄 노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처럼 허들을 넘던 서연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들이다. 이 비극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의료 지원, 복지 혜택, 간병 정책 모두 서연에게는 넘을 수 없이 높고 이해할 수 없이 뾰족하기만 하다.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가 있고 자산으로 등록된 덤프 트럭이 있어 그는 사회적 지원에서 손쉽게 제외된다. 핵가족의 시대, 손을 내밀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닿았던 친척들 또한 기댈 구석도 비빌 언덕도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된 서연에게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사는 곳'일 수가 없다. 제도와 규칙이 서연에게 안타깝다라는 말로 도망칠 때 홀로 남은 서연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정도 인색한 세상의 눈길 앞에서 눈 마주칠 수 있는 방향은 어디일까. [허들]의 결말은 서연이 선택한 것이지만 그것이 온전한 그녀의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모두는 알고 있다. 쉬이 녹지 않는 무겁고 습한 눈더미처럼 서연의 삶이 관객들에게 한기로 느껴질 때 우리는 각자의 옷깃을 바짝 세워 자신을 보호하는 것 말고 어떤 선택을 더 해야 할까.
실제 사건에서 기반한 <허들>은 극적 서사의 안전한 결론을 택하는 대신 무수한 질문들로 관객들의 삶에 다가서려는 영화다. 노화와 질병은, 사고와 돌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모두에게 닥쳐올 시간의 파도 같은 일이며 한 개인의 성실한 삶의 태도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모두가 저속노화를 이야기 하고 웰-에이징과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사각지대로 떨어진 이들의 삶이 낙오자의 변수가 아님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애써 더 좁은 테두리 안으로, 더 안전한 금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하기를 멈춘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선을 넘는 선택이 어렵다면 세상에 그어진 선에 대해 그 기준과 높이와 넓이에 대해 더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것으로 우리가 함께 선의 기준을 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게 변화하는 선이 기대하지 못했던 삶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향해 언제든 넘을 수 있는 울타리의 존재야 말로 우리가 타인의 삶을 막연한 공포로 바라보지 않은 적정한 높이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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