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오름에서 바라본 당오름(사진 왼쪽)과 당오름에서 바라본 정물오름. 두 오름 사이에 조성된 삼나무 조림지가 남·북제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당오름·정물오름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와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를 잇는 1116번 지방도로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당오름. 북쪽으로 이시돌목장 내의 정물오름과는 이웃해 있으면서도 등을 돌린 채 서로 남북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당오름은 옛날부터 당(堂)이 있어서 무속인이나 지역주민들이 오르내리며 축원했다고 해 당오름이라고 알려졌는데 지금은 실제 당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제주도 오름과 마을이름의 저자 오창명씨는 “당악(唐岳)을 나중에 당악(堂岳)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오름은 목장 내부에 있어 나무가 드문 대신 묘가 많다. 묘는 우마의 피해를 덜기 위해 하나같이 높은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분화구내에는 일제시대 진지동굴이 남아있는데 역시 우마가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으로 둘레를 막아놓았다.
당오름 서쪽에는 제주출신으로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추모비와 그의 아버지와 아들의 묘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고득종은 조선조에 제주출신으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인물로 그 후손들도 제주에서 한가락하고 있어서인지 추모비와 묘지가 제법 위풍당당하다.
당오름을 내려와 정물오름으로 향했다. 두 오름 사이에는 삼나무 조림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남·북제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정물오름 능선을 오르는데 바로 앞에서 노루가 뛰쳐나온다. 오름 바로 밑에는 이시돌목장이 자리잡고 있고 북서쪽에는 골프장이 한창 조성 중이어서 그다지 조용한 곳은 못되지만 노루에게는 여전히 삶의 터전이다.
오름 북서쪽에는 과거에 식수로도 이용했던 쌍둥이샘인 정물(井水)이 있는데, 이 샘에서 정물오름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물오름에는 주인을 위해 개가 가르켜 준 ‘옥녀금차형’의 명당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개의 주인 강씨무덤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또 정물오름 일대는 과거 제2훈련소 산하 연대가 주둔했던 지역으로 사격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땅을 파다보면 가끔 그 흔적들이 나온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시돌목장을 바라보며 오름을 내려오니 얼마 전 새로 조성한 산록도로 건너편에 동화속 그림 같은 집이 한 채 외로이 서있다. 과거에 이시돌목장 개척 당시 목장근로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수십채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세채만 드문드문 횅하니 남아있다.
[전문가 리포트]물은 산의 ‘혈맥(血脈)’
▲당오름 분화구의 묘. 명당으로 알려진 당오름 곳곳에는 묘가 들어서 있다.
당오름 분화구의 묘. 명당으로 알려진 당오름 곳곳에는 묘가 들어서 있다. 예로부터 물은 산의 혈맥(血脈)에 비유되어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사람을 해롭게 하는 변화의 원천으로 상징되었다. 땅 속을 흐르는 지기(地氣)는 물을 만나야 기운이 모인다. 명당은 산을 중심으로 물의 흐름과 변화를 보고 선택하는데 산이 가면 물이 따르고 물이 가면 산이 따르니 이 모두가 음양의 이치이다.
당오름은 서쪽의 땅기운이 원물오름에 이어 결정을 이루는 곳이다. 그 유연하면서 풍만한 자태는 남사면쪽으로 흘러내리고 다시 한줄기 기운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면서 곳곳에 망자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포근하게 이어진 완만한 구릉은 마치 선학(仙鶴)이 목을 길게 드리운 듯 하고 동쪽으로 오밀한 봉우리들이 오행의 조화를 이루어 우주적 철리를 담는다. 반대편 서북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는 양팔로 포근하게 감싸안은 기세로 풍수적 국세를 이루는 곳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서면 오른쪽 정물오름이 부봉의 형태로 백호를 보조하듯 받쳐 주고 있다. 그 앞으로 금악오름과 저지오름이 보기 좋게 보인다. 오름의 정상부에서 동남쪽을 향하면 물이 돌아오는 형태인 회류수(回流水)를 이루고 서북쪽을 향하면 흘러 온 물줄기가 우측으로 돌아 횡류수(橫流水)를 이루며 유유히 감고 나간다.
제주의 오름에 당터를 이루는 곳은 우주의 이치를 담고 있는 지세를 이용하는데 대체로 풍수적요체인 수기(水氣)가 빼어난 곳이다. 물은 정신과 지혜와 사상을 의미한다. 산과 물이 유기적 관계를 이루면 음양이 합치하여 유정하여 신과 융합하는데 최적인 것이다.
정물오름은 ‘개가 알려준 명당지’로 유명한데 기본적으로 풍수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서쪽으로 양날개를 벌려 어미 새가 알을 감싸안듯 봉긋하게 솟은 알오름을 품고 있는 형상인데 기운이 참으로 양명한 곳이다. 그 안쪽으로 솟아나는 풍부한 샘은 아름다운 수기(水氣)의 절정을 이룬다. 그 포근한 자리에서 동북을 자리 삼아 서남을 향하면 풍수적 물형으로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국으로 명당의 요건을 갖춘 곳이다. 그것은 물과 산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이 가고 오는 곳은 분명 땅이 양명한 곳이다. 정물오름 주변의 경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자연의 성정이 포근하면 인심이 살아나고 지향하는 삶의 형태가 아름답게 변화하는 것이니 오늘날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다.
<신영대 탐사위원(제주관광대 교수/풍수분야)>
[포커스]텍스본-이시돌 개척사 담긴 동화속 그림같은 집
▲주변 정경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양식의 텍스본. 텍스본은 이시돌목장 개척 당시 근로자들이 살던 주택이다.
텍스본은 지난 1960년대에 맥그린치 신부가 이시돌목장 개척 당시 근로자들을 위해 지은 서양식 주택이다. 당시 거주했던 김봉원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의 증언에 따르면 수십채에 목장관리인과 근로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텍스본이라는 이름은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의 한 지명에서 따왔다. 맥그린치 신부가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2천년간 이어온 주택양식이 바람 많고 척박한 제주땅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이시돌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주택을 지었다. 텍스본은 초가집이 태반이었던 당시에는 서양식 건축물로 눈길을 끌었다. 철근이 귀한 때라 시멘트와 목재로만 지었다고 하는데 시멘트값이 워낙 비싸 시멘트와 모레의 비율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제주 바닷모래 질도 좋지 않아 이후 부실공사의 징후가 드러났다고 한다. 김봉원 이사는 집안에 있다가 현관 천정이 내려앉아 혼쭐이 난 적도 있다고 증언한다.
이시돌목장은 한창때는 급여를 주는 근로자만 1백20여명이 넘었는데, 이후 개척농가에 땅을 분양하면서 텍스본까지 같이 제공했다. 그러나 현대식 시설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농가들이 새 집을 지으면서 이제는 목장단지 내에 세채만 폐가로 방치돼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건물들도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지만 다행히 아치형의 지붕 덕택에 무너지지는 않고 있다.
가끔 신혼부부나 관광객들이 지나가다 독특한 건물의 모습에 매료돼 집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데, 관광상품화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 한림 지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시돌목장의 개척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김봉원 이사의 제안으로 이시돌개발협회는 한채를 보수해서 이시돌목장을 찾는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