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1)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1)
역모사건에 휘말린 조선의 왕자들
  • 입력 : 2012. 02.13(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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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는 유배인들이 드나든 한 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이건 형제들 역시 제주 유배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들어와 7년간의 유형생활을 시작한다. 과거엔 별도(別刀)포구로 불리기도 했다.

인성군 숨진 뒤 부인과 7남매 제주섬 이배
17세기 제주 생활상 보여주는 풍토기 남겨


"가장 괴로운 것은 좁쌀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였다. 도성에서 날아오는 소식으로는 고향소식을 꿈속의 넋으로나 부쳐보는 수밖에 들어볼 길이 없다. 질병이 닥쳐도 다만 어쩔 수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침이나 약을 시행해 볼 방도가 없다. 이곳은 실로 온 나라 유형지 중에서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곳이므로 국가가 이 땅에 죄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곳으로 매우 적당함이 분명하다."

조선 선조(1552~1608) 임금의 손자 이건(1614~1662)은 '제주풍토기'에 제주 유배의 어려움을 절절히 표현했다. 그는 왕족이면서도 유배 중 목격한 말과 해산물, 감귤 등 토산물의 진상 폐단을 일일이 기록하며 제주사람들의 고달픈 삶에 마음 아파하고, 탐관오리들의 횡포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17세기 제주의 풍토와 풍속을 기록한 그의 문집은 당시 시대상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문서로 지금도 많은 글에 인용되고 있다.

1623년(광해군 15년)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선조의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낳지만 광해군에 의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는 이때 대왕대비로 복권된다. 당시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수십 명은 참수되고, 추종자 200여 명이 유배된다. 광해군 때 목숨을 부지했던 선조 임금의 7남이자 인조의 숙부인 이공(李珙·1588~1628)도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화북포구 옛 자취를 알려주는 표석.

12세에 인성군(仁城君)에 봉해진 이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선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평생 네 번의 반역사건에 거듭 연루된다. 특히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왕족을 대표해 주도한 전력 때문에 인조반정 후에는 여러 공신과 유생들이 그를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상소를 올린다. 인조는 "광해군이 총명한 인성군을 시기했기 때문에 폐비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인성군을 옹호해준다.

그러나 1625년(인조 3년) 2월 인조는 영의정을 포함한 대신들의 계속된 요청에 인성군에게 강원도 간성 유배 명령을 내린다. "모두 나와 날마다 세 차례씩 간청하고 있으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나도 감히 당초의 뜻을 완강하게 고집할 수가 없어 우선 억지로 따르는 것이니, 중도(中道)에 안치하도록 하라. 아, 이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겠는가. 거처도 편하게 하여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하라."

역모사건에 휩쓸리지만 인성군의 인간 됨됨이를 헤아린 인조는 그가 유배 중 병이 들면 내의원 의관을 보내 간병하게 하는 등 극진히 보살폈다. 인조 자신이 광해군 때 동생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열일곱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이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난 아픔을 지녀 그 억울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성군이 유배 중 그의 장남 이길과 부인이 면회를 갈 때도 "역적 가족은 역마를 타고 가게 해야지 말을 내주면 관례가 된다"는 대신들의 상소를 물리치고 타고 갈 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인조는 이후 원주에 유배됐다가 1628년 진도로 옮겨진 인성군에게 결국 자살 명령을 내린다. 실록은 왕자를 비롯한 종실과 인목대비까지 나서 사형을 요구하자 임금이 부득이하게 이를 따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형제 또는 종친들은 이처럼 언제든 역모사건에 휘말릴 수 있었으며, 왕이 될 만한 능력을 지닌 왕자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았다.

인성군은 매우 덕성이 깊었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아들 이건은 아버지가 죽기 전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을 묘지(墓誌)에 기록했다. "임금이 천추만세(천만년의 긴 세월) 후에 만약 도성을 떠나 피난해야 하는 환난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라야 한다. 만약 왕조를 바꾸는 변난이 있으면 반드시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켜야 한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결국 죽게 된 아비가 자식들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이지만 양반보다 규제가 더 심했던 왕족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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