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광장]신구간 그 어느 날에

[한라광장]신구간 그 어느 날에
  • 입력 : 2015. 03.03(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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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간.' 제주도에만 있는 풍습이고 말이다.

신구간은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 일주일을 말한다. 신구간은 임기를 마친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운 소임을 맡은 신들이 내려오기 전, 그 기간을 말한다.

그리 어둡지 않은 시간인데, 서쪽 하늘에 큰 별 하나가 제 몸을 드러내 추파를 던진다.

나는 별에 눈길이 머물러 손놀림을 멈추었다.

'개밥바라기.' 해가 지는 저녁, 서쪽 하늘에 뜨는 금성을 개밥바라기, 혹은 장경성이라 부른다. 개밥바라기라는 뜻은 개가 저녁밥을 바랄 무렵에 뜨는 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별에 이름이 참 정겹다. 가늠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제 몸을 드러내 나의 마음자리로 파고드는 개밥바라기. 짧은 순간, 경이로움과 함께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수억 광년, 혹은 그 보다 더 먼 거리에서 별은 저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너는 어떠냐?"

수선스런 마음을 주섬주섬 다 잡으며 나는 내게로 온전히 마음을 열어 혼잣말을 걸어본다.

가늠 안 되는 거리에서 스스로 빛을 뿜어 수많은 이들의 마음자리로 파고드는 별의 겸허함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며 내 주변과 내 삶을 끌어안아 슬며시 자족의 미소를 허공으로 보낸다.

이사. 십수 년 북박이처럼 살던 곳에서 나와, 새로운 곳에 터를 마련했다.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낯설음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사이 내가 느끼고 깨달은 것 역시 그 시간만큼 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욕심이 많다는 사실과 필요이상으로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그 편리한 것을 추구하느라 혼신의 힘을 쏟다가 대부분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십수 년 쌓인 짐은 정말 많았다. 8톤 트럭분량이었으니 말이다. 이사를 하면서 첫 번째 조건은 살림살이가 모두 들어가는 집을 골라야 했다.

살아가는데 무슨 물건들이 그리도 많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버릴 물건을 하나도 찾지 못해 죄다 실어날랐다. 그리고 얼마간 짐 정리하느라 정말 여념이 없는 생활을 했다. 이제 더는 물건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던 곳에서 혹은 있었던 곳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은 때가 되면 옷가지 몇 가방만 챙겨들고 떠날 수 있는 삶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제가 쟁여 놓은 살림살이에 발목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고, 살고 싶은 공간으로 이동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느끼고 또 느꼈다. 게다가 버리지도 입지도 않은 옷들은 또 어찌 그리도 많은지……. 한심하고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50년 사들인 옷들이고 소용에 닿는 물건들이었으니, 이제 더는 구입하지 않을 작정이다. 옷들과 물건들을 수선하고 고쳐 쓰며 남은 나의 삶을 보다 가볍게 살아갈 생각을 하니, 늙은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가지지 못함에 화나지도 않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싫지 않다.

늙음을 즐기며,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될 것을 다짐하며, 곁에 와서 앉는 남편에게 투정부리는 아이가 되어 한 마디 툭 던져본다.

"있는 거 쓰고, 고장 나면 버리고……, 이삿짐 꾸리고 정리하는 일, 이제 더는 늙어서 못하겠어."

20년 내 옆에 있던 착한남자가 말을 받는다. "이제 이사 하지 않아야지……."

미안함이 배어 있다. 그의 하얗게 물든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눈에 들어와 앉는다.

'당신도 힘들지…….' 제주도에만 있는 신구간, 그 어느 날에 나는 나의 남편과 개밥바라기를 바라보며 아무도 몰래 혼자 웃는다.

개밥바라기, 그 큰 빛의 얼굴이 내게 다가와 웃음으로 안기는 밤에. <장수명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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