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흘곶자왈내 돌숯가마. 현무암으로 축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중산간·해안마을 모두 곶자왈에서 필수품 충당숯가마터, 화전·산전·수전터, 동굴유적 등 분포과거 제주사회 경제활동의 중요한 장소로 이용
제주 곶자왈은 산림생명자원의 보고일 뿐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자연유산이다. 무엇보다 곶자왈은 과거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우리네 선조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도 우리와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역사문화측면의 연구에서 곶자왈의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는 등 두드러진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정광중 제주대학교(교육대학) 교수는 '곶자왈의 인문사회자원의 현황과 보전을 위한 제언'에서 곶자왈 주민들의 경제활동은 연료를 얻기 위한 숯 생산, 신탄 및 땔감 채취, 가정용 그릇 공급을 위한 옹기류 생산, 재산 증식은 물론 효율적인 농경을 위한 우마 사육, 식량작물의 생산을 위한 산전·화전·수전 경영, 노루·오소리·꿩 등 야생동물을 포획하기 위한 사냥활동, 가정의 다양한 가구·목기류 및 농기구 등의 획득을 위한 생활용구 제작, 아이들의 간식용 열매나 식재료 및 약재 채취, 양봉 등 다양했다고 밝혔다.
저지곶자왈 동굴에 살고 있는 박쥐. 사진=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시기와 장소, 활동범위에 따라 다소 다르게 나타날 뿐 우마의 방목을 위해 곶자왈을 낀 넓은 초지가 필요했고, 산전·화전·수전을 일구기 위해서도 곶자왈 내 일정한 면적이 있어야 했다. 또 숯과 옹기류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장소에 숯가마와 옹기가마를 축조하고, 이에 따른 많은 재료와 땔감을 곶자왈에서 얻었다. 정광중 교수는 "제주도민들이 중산간, 해안마을 상관없이 가정에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주변에 위치한 곶자왈에서 충당하고, 곶자왈 내 특정 장소를 활용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곶자왈 지역에서는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가치 있고 소중한 역사 유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최형순 박사의 '곶자왈의 현황과 연구동향'에 따르면, 저지곶자왈에는 동굴유적 12개소, 산전터 3개소, 1회용 숯가마 2기, 돌숯가마 4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청수곶자왈에는 동굴유적 2개소, 돌숯가마 1개소, 1회용 숯가마 10기 이상, 머들(돌무더기의 제주 방언) 5개소, 산전터 5개소, 병풍제단 1개소, 음용수 유적 2개소, 도요지 1개소가 조사됐다. 무릉곶자왈에는 동굴유적 2개소, 산전터 5개소, 머들 10개소, 숯가마 추정지 1개소, 마을유적, 돌숯가마, 수혈식 움막 3개소 등이 발견됐다.
노루 잡기용 석축시설인 선흘곶자왈 노루텅. 사진=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특히 선흘곶자왈의 경우 '곶자왈'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장소로 이용됐음이 밝혀졌다. 숯 굽기, 목축, 산전 경작, 사냥, 생활용구 제작, 기타 생활경제활동의 공간 등 다양하게 활용됐던 것으로 조사됐다.
'선흘곶자왈의 역사문화자원(강창화, 정광중, 최형순, 현화자, 김찬수)'에 의하면, 주요 유적으로 돌숯가마 2기와 원형 흙숯가마 78기 등 숯 생산유적 80여기, 동굴유적 1기와 숯막 50여기 등 주거유적 51기, 머들과 밭담 등 농경유적 20여개소, 노루 함정 등 사냥 관련 유적 7기, 마소용 원형 돌담연못 등 음용수 관련 유적 10개소, 재단 등 신앙 관련 유적 2개소 등이 확인됐다.
선흘곶자왈에서 확인되는 돌숯가마들은 벽체와 천정 부분이 모두 현무암으로 축조, 곶자왈 내에 있는 돌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입구, 소성실(燒成室), 배연구, 보조배연구 등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에는 가마와 관련한 작업공간과 숯막 등의 석축시설이 남아 있다.
목시물굴 입구 전경. 사진=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또 선흘곶자왈 내 단위생활 군집유적의 측량조사 결과 약 8200㎡(약 2480평) 크기의 산전 경계돌담 안에서 돌숯가마 1기, 임시용 숯가마 12기, 숯막 1기, 노루텅(노루 잡기용 석축 시설) 3기, 머들 33기, 물웅덩이 1기가 조사됐다. 이들 유구의 형성 시기는 조선시대(19세기)~현대(1960년 중반)로, 시기별로 사용된 유구들이 다르게 나타났다.
동굴유적의 경우 '목시물굴'로 명명된 용암동굴 내부에 형성됐으며, 신석기시대의 압인정렬문계의 토기와 청동기시대의 직립구연토기, 탐라시대의 적갈색경질토기, 근현대의 옹기편 등 주로 신석기시대와 탐라시대의 유물이 확인됐다.
즉, 각각 사용 시기가 다를 뿐 군집현상을 보여주는 '단위생활 군집유적'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곶자왈로부터 다양한 자원을 얻어 생활을 이어갔다.
이 같은 선흘곶자왈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탐라지 등의 고문헌과 고지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후 일제가 시행한 삼림령(1911년 9월)으로 인해 선흘곶자왈 내 나무들에 대한 벌채가 제한됐다. 이후 삼림계(1953년)가 조직돼 선흘리에 위치한 곶자왈과 임야에 대한 관리와 보존을 체계화하기 위해 2개의 마을 조직이 서로 경쟁과 협력을 통해 곶자왈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