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 꽃송이 피어나는 굴뚝으로 들어간 장화 신지 않은 고양이

[하루를 시작하며] 꽃송이 피어나는 굴뚝으로 들어간 장화 신지 않은 고양이
  • 입력 : 2016. 01.06(수)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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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가로 세로 2센티의 이층집을 그렸다. 큰 종이 왼편에 검은색으로 조그맣게 그린 집 굴뚝에서는 연기 대신 꽃송이가 피어난다. "가족은 없어요. 귀여운 고양이 세 마리랑 같이 살아요." "친구도 없어요." "무서운 회색 연기보다는 예쁜 꽃이 좋아요. 우리 집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향기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다른 그림은 엄지손가락만한 아주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이다. 꼭대기엔 별이 반짝이고 하트와 리본과 꽃들이 빽빽이 박힌, 네 갈래 뿌리가 도드라져 보이는 그림이다. "하트랑 리본을 더 그리고 싶은데…. 나무가 작아서 못 그렸어요."

아이는 수년간 친부로부터 감금과 폭행, 방치로 이어지는 학대를 당했다.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있다가 탈출해 구조되었다는 아이. 열한 살의 평균치에 턱없이 모자란 아주 작고 야윈 몸이었다. 친부의 지속적 학대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가족'은 사라진 채 깊은 상처로만 남았다. 마음의 공허함과 애정 결핍, 불안감이 아픔으로 뒤범벅되어 야윈 몸만큼 고스란히 그림에 담겼다.

"거기 있으면 나와, 놀라게 말고. 얼른!" 지레 겁먹은 내가 소리친다. 가을 초입 어느 날, 아기 길고양이가 들어왔다. 밤새 가게 안쪽에 숨어 있다가 도망치느라 갑자기 뛰쳐나와서 몇 번을 혼비백산했다. 어디든 뛰어오를 수 있는 고양이는 물건들을 엎어 놓고 뒤적여 놓았다. 나는 원체 동물이 무섭다. 친해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장화도 신지 않은 채 돌아다니다가 와서는 쿠션이나 의자 위에 더러운 발자국을 찍어 놓거나 제 자리처럼 새초롬히 앉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데나 볼일을 본다. 동물보호단체에서 빌려준다는 고양이 덫을 놓아 잡아서 보내려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수무책이다가 하루는 딱 마주쳤다. 화분들 틈에 숨어있는, 눈에 대고 같이 살 수 없는 이유를 큰 소리로 찬찬히 여러 번 설명했다. 첫째 난 너무 잘 놀라고, 둘째 비위가 약해서 싸 놓은 응가를 치우려면 생각보다 훨씬 심한 고역이고, 셋째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녀도 자잘한 물건이 너무 많아 깨뜨리고 엎어 놓을 거라고. 실제로 몇 건의 전과가 있다고. "알았지? 안 돼!" 눈도 깜짝 않고 대답도 없는 다짐을 받느라고 재차 반복했다. 그런데 아, 불꽃 튀는 눈싸움을 하던 그 눈이 슬퍼지는 게 아닌가. 결국 고양이는 떠났다. 신기하고 홀가분했지만 날이 추워지자 가끔 미안해졌다.

그림의 아이는 사람 가족 없이 고양이 세 마리와 산단다. 고양이는 맨발로 아이와 뒹굴고 과자를 나눠 먹고 같이 잠들 것이다. 아이는 고양이 응가도 기꺼이 치울 것이다. 가족이니까. 친절한 척 자분자분 말했지만 같이 살 수 없는 나의 이유란 게 얼마나 쌀쌀맞고 냉정한가.

뭐든 돌보려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풍족하게 먹이고 입힌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아이는 부러진 장난감이나 잃어버린 놀이 카드 한 장에도 엄청나게 불행하다. 잘 돌보고 있다는 어른들의 욕심에 아이들이 치인다. 놀고 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 다른 학대다. 나는, 창문 꽁꽁 닫힌 집에서 아이가 숨 쉴 곳은 굴뚝 밖에 없지 않았을까, 굴뚝을 타고 피어난 꽃송이는 아이의 한숨이 아닌지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 내 아이는 행복했을까.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어쩌면 내 편한 식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안타깝게도, 이미 어른이 된 아이에게 어린 날을 되돌려 줄 수 없으니. <김문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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