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7) 의사·사회복지시설장 제주여성 1호 고수선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7) 의사·사회복지시설장 제주여성 1호 고수선
조국과 여성, 아이를 뜨겁게 사랑했던 '제주도의 별'
  • 입력 : 2016. 11.03(목) 00:00
  • 채해원 기자 seawo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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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권익 찾는 길은 여성 스스로 쟁취해야"
도내 여성 최초로 정치도전 등 열정적 활동
3·1독립만세운동 참가 등 항일운동에 적극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자이자 항일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제1호 여성의사이자 사회사업가로 치열한 삶을 보낸 이가 있다. "여성의 권익을 찾는 길은 여성 스스로 챙취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제주 여성 최초로 정치입문을 시도한 고수선(1898~1989)이다.

많은 업적을 남겨 '제주도의 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항일운동가와 사회사업가로서의 업적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독립자금 모금 혐의 체포 가혹한 고문=여성은 언문만 하면 충분하던 시절, 고수선은 배움에 목말라 4km 떨어진 야학을 부모님 몰래 다녔다. 아버지 고석조(고영조)씨에게 들켜 한동안 공부를 접었지만 결국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이후 제주에서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16년엔 신성여학교 동료인 최정숙·강평국과 함께 서울에 있는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서울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 그녀가 부당한 일제의 가르침에 저항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일본인 교사 시바다가 미술시간에 일장기를 그리도록 지시하자, 이를 외면하고 태극기를 그려냈다. 이에 학교측은 그녀를 불령(不逞)학생으로 낙인찍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두려워 하지않고 강평국·김일조·노순열과 국기동지회를 결성한다. 심지어는 하얀천에 국기를 그려 그것을 옷소매 안쪽에 꿰매어 숨겨다니기도 했다.

1919년 고종황제 승하를 경험한 고수선은 3·1독립만세 운동에 학생신분으로 참가한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기독교중앙감리교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며 학생들의 중심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결국 3·1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되자 같은해 사범과를 졸업, 충청남도 논산에서 교사로 생활한다.

80대 노후를 독서하며 보내고 있는 고수선.

이때 그녀는 박정식의 부탁으로 독립군 자금 370원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곧 주요인물로 부각된 고수선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은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 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할 것을 주선한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는 끝이 없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관동대지진마저 일어났고, 이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녀는 몸이 쇠약해져 결국 1922년 조국으로 돌아온다.

국내 귀국 직후 고수선은 3·1운동 모의, 독립자금 모금 등의 혐의로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이 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녀의 손가락은 울툭불툭 튀어나오게 됐다. 생전 고수선은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수선의 가족 사진. 앞줄 맨왼쪽부터 남편 김태민, 친정어머니, 고수선. 뒷줄엔 1녀 3남 자녀들이 함께하고 있다.

▷제주모자원 설립 등 사회사업가의 삶=이후 고수선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을 입학·졸업해 한국인 여의사 1호가 된다. 이후 그녀는 개성에 있는 남성의원 소아과에 근무했고, 고향에서 보람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과 함께 돌아왔다. 제주로 돌아와 그녀는 조천에서 의원을 개원해 어려운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이 때 제주도가 배출한 첫 양의사 김태민과 결혼해 조천을 비롯한 한림, 서귀포, 고산 등을 돌아다니며 장춘의원을 운영했다.

아울러 고수선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단체를 창립해 신생활 운동을 펼쳤다. '동이구덕'으로 빵 부조 안하기, 머리쪽지기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제주도 주재 일본경찰의 감시는 여전했다. 그들은 '평소 신사참배도 하지 않는 배일 분자가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다"며 고수선을 탄압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펼쳤고, 여성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선거와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비록 선거에 떨어지긴 했지만 제주여성이 처음으로 정치에 도전한 사례로 기록됐다.

태평양전쟁 중반 강경으로 잠시 생활 터전을 옮겼던 그녀는 1·4후퇴때 다시 귀향했고, 의사생활을 접었다. 이때부터 고수선은 본격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한다. 전쟁고아를 구휼하고자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 제주모자원을 설립하고 이어 1951년엔 송죽보육원을 설립한다. 또한 아이들을 좋아했던 고수선은 이 자리에 어린이집의 시초인 선덕어린이집을 설립·운영한다.

어린이집 운영은 꽤나 어려웠다. 당시엔 보조금도 없고 아이들에게 보육료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막고 살아가기 힘든 때였던 만큼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잘 보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태에서 직접 집을 방문해 아이들을 데려와야 했다. 다행히 제주시에서 보육료를 결정하면서 아이 1명당 3000원을 받고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교사도 1명 채용할 수 있게되면서 지금의 어린이집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노년에는 제주도 노인회를 설립해 노인들의 권위를 세우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처럼 아이와 여성, 노인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했던 고수선. 그녀의 업적은 오늘날 제주도 내에 사회복지시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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