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16-1. 욕망의 종말
해연은 마음의 평정을 잡은 듯 느긋하게 보였다. 그런 해연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용찬이 말했다.
"이젠 회한의 당사자가 돌아가셨으니 증오의 꺼풀도 벗겨진 셈이지."
용찬이 뒤돌아섰을 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해연이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얘기 좀 해요."
절주를 실천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으나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못해 마신 술에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그들은 택시를 잡아타고 어영 바닷가로 갔다. 인적 끊긴 어두운 도시를 빠져 나가니 환하게 불을 밝혀 불야성을 이룬 카페촌이 나타났다. 한밤중인데도 카페에는 젊은이들로 가득 했다. 해연을 위층으로 올려 보내고 아래층에서 커피 주문을 하고 기다릴 때 벽에 붙은 포스터가 유난히 용찬의 눈길을 끌었다. 멋진 유람선을 타고 제주의 해안선을 관광하자는 것이었는데 눈길이 멈춘 것은 대룡관광유람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왕금산이 유람선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그러나 왕금산의 얼굴이 떠오르자 용찬은 재빨리 포스터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용찬이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늦은 밤바다를 즐기려는 쌍쌍의 연인들이 창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해연은 바닷가로 트인 창가에 시선을 꽂은 채 꼼짝도 안했다. 가까이 보이는 수평선에는 집열등을 밝힌 배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점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부동자세로 반짝였다.
"제주 바다는 언제 보아도 위안을 줘요."
해연이 편안한 표정으로 커피 컵을 잡으며 침묵을 깼다.
"유년 시절에는 동경과 갈망을 키우던 바다였는데."
"이렇게 한 번씩 마음속에 바다를 담고 가면 모든 일이 편안하게 잘 풀려요."
해연의 얼굴은 너무도 편안해서 아버지를 잃은 상주의 그늘진 슬픔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인생의 씁쓸한 맛을 본 성숙함에서 오는 잔잔한 우수 같은 것이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산사의 생활에서 터득했을 초연함 때문이라고 용찬은 미루어 짐작했다.
"한창인 연세신데 정말 안됐어."
용찬의 말에 해연은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꾸를 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할 말 없어요. 말하고 싶지도 않고. 제게 피와 살을 주신 숙명적인 고마움이 있긴 하지만, 그분이 살아오신 삶에 대해선 연민을 느낀 지 오래됐어요. 특히 권 기자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 와요."
오빠라는 호칭이 권 기자님으로 바뀐 것에 용찬은 서운함을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왔던 길로 돌아가는 거지만..."
용찬은 말끝을 흐리며 커피 잔으로 입을 막았다.
"업보죠 뭐. 권 기자님은 운명을 믿어요?"
"운명은 개척하는 거 아닌가?"
한심스러운 철부지 같은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해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권 기자님다워요.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우수에 찼던 해연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덧없는 일이야. 태어나기 전부터 미워해야 할 운명이었지만 난 그런 거 믿지 않았어. 그건 선대의 일이고 난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걸 인정해 주지 않더군."
"저 때문이죠? 저도 그때 많이 방황했어요. 이제야 이렇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정말 심각했어요."
해연은 다시 마음의 평정을 잡은 듯 느긋해 보였다. 그런 해연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용찬이 말했다.
"이젠 회한의 당사자가 돌아가셨으니 증오의 꺼풀도 벗겨진 셈이지."
해연은 찻잔을 응시하며 옛 기억을 더듬어 냈다.
"절에 있을 때 저를 찾아오셨다는 소리 나중에 들었어요."
용찬은 종필에게서 소식을 들은 뒤 수소문 끝에 해연이 있는 절을 알아냈다. 리화를 떠나보낸 후, 허전한 마음속으로 찾아드는 해연이 보고 싶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만사를 제쳐두고 먼 산길을 돌고 돌아 절을 찾아갔다.
산사 사무실에 도착했으나 가열한 노력도 허망하게 절벽을 만났다.
"수행 중에 있는 불자는 면회 할 수 없습니다."
"스님, 멀리서라도 한 번만 볼 수 없을까요?"
부처처럼 유난히 귀가 크고 인자하게 생긴 여승은 용찬이 딱하게 보였는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나왔다.
"먼 길을 오셨는데 못 만나는 것도 다 부처님의 섭리지요. 이왕 오셨으니 부처님 말씀을 간직하고 가십시오."
용찬은 허탈감에서 시작된 무기력증에 빠져 일손을 잠시 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여승이 준 책은 법구경이었는데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지지 마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런데 한밤중에 유람선이 움직이다니?
용찬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대호의 암시가 저것이었구나."
"그땐 간절했지. 절망의 나락도 맛보았고,"
"사람의 인연이란 게 인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권 기자님 이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난 눈길 한번 안 주었는데 참 열심히 쫓아다니다 아버지한테 걸려 혼났죠. 그때는 보잘 것 없었는데,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가 됐어요."
용찬은 순간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지?"
해연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눈길을 피했다.
"그건 노코멘트죠."
용찬은 그가 왕금산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언젠가 금산을 만났을 때 지나가는 말로 해연의 안부를 물은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 그의 표정이 왜 그리 쓸쓸했는지를
용찬은 이제야 알았다. 그 후 여러 번 만나면서도 내색도 안 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중국인의 유전자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붙잡지 못한 게 후회스럽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해연은 갑자기 상체를 용찬에게로 숙이더니 얼굴 가까이에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담배 안 끊었어요. 냄새나는 것 같은데...?"
용찬은 화장실에 가서 입을 행구고 나오지 못한 게 후회됐다.
"아냐, 그때 끊었지. 조문객들 틈에 있다 보니 몸에 배었나 봐."
용찬은 어쩌면 이리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임기응변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러자 해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돌았다.
"생각나요? 우리 첫 키스 했을 때. 난 눈을 감고 달콤한 맛을 기대했었는데 웬걸 훅 달려드는 담배 냄새 때문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용찬은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날, 초조해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담배만 피워댔던 일이 기억났다. 갑자기 머리가 간지러워 손을 올려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렸지. 그때부터 난 금연하기로 맹세했지."
"그래도 나 때문에 달라진 게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건강을 챙겨줬으니 내가 고맙지 뭐."
용찬은 속이 따끔했으나 시치미 떼고 주변을 살피는 척 하며 해연의 시선을 피했다.
해연이 핸드백에서 자그만 사각봉투를 꺼내더니 용찬에게 내밀었다.
"저 교향악단에 들어갔어요. 첫 연주회 티켓인데 시간 되시면 오세요."
원래 어영 카페촌은 랜터카의 천국이지만 외진 곳이고 늦은 시간이라 택시들의 교통은 많지 않은 곳이었다. 한참을 길가에서 기다려서야 콜택시가 왔다. 해연을 먼저 태워 보내고 용찬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해연과의 데이트에 엷은 흥분 같은 것이 남아 있어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기도 했지만 그런 감정을 오래 즐기고 싶어서였다.
평화로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걷다가 용찬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전조등만 켠 채 유유히 바다 위를 떠가는 검은 물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선실의 불도 켜지 않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이 수상했다.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시키니 그 배가 아까 포스터에서 보았던 유람선임을 알았다. 순간 용찬의 뇌리에 번뜩이며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용찬은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어 네이버 주소창에 '대룡관광유람선'을 치고 검색을 했다. 유람선은 두 시간마다 해안선을 따라 비양도를 거쳐 오는 코스였고 마지막 시간은 6시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유람선이 움직이다니?
용찬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대호의 암시가 저것이었구나."
용찬은 얼른 해양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