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배의 '시간-이미지'. 외과용 메스로 물감 바른 표면을 수도 없이 긁어내는 과정을 거치며 완성시켰다.
한라일보 갤러리 이디이달 18일부터 두 달간
문창배 작가.
실재하지 않는 자연물을 실재하듯 그리며 시간의 감각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동안 그의 몸은 남모를 고통을 겪었다. 어깨, 허리, 눈 등에 이상이 왔고 결국 몇 해 전 수술대 위에 누웠다. 정교한 붓질을 잠시 멈추려 작업 방식에 변화를 줬지만 그것 역시 고된 일이었다. 오히려 붓 작업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다.
붓 대신 외과용 메스를 잡고 새로운 형상의 '시간-이미지' 연작으로 한라일보 갤러리 이디(ED) 초대전을 펼치는 제주 문창배 작가다. '시간'이란 제목을 단 이번 초대전은 머지않아 나이 50대의 문턱을 밟는 문 작가의 작업 여정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 같다. 4년 만의 개인전에서 문 작가는 정적인 대상에서 역동적인 자연 현상 속으로 눈길을 돌렸고, 지난 세월의 풍파를 타고 넘은 노(老) 배우까지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중점적으로 그린 '시간-이미지' 연작엔 검은 바위 사이로 파도가 솟구치고 있다. 예전 물 아래 잠긴 몽돌이 평온한 분위기 속에 층층이 쌓인 자연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면, 이번 바다 위 몸체를 드러낸 뾰죽한 돌과 세차게 맞서고 있는 듯한 파도의 시간은 일상에 파문을 던진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시간은 돈'이란 생각을 낳았고 이는 개인들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찾아 누리도록 어렵게 만들어 왔다. 꽃 피고 지는 계절을 따라 우리네 생애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좋으련만, 환금성을 지닌 시간은 자꾸만 우릴 재촉하고 있다.
문창배의 '삶, 시간-이미지'. 우리에게 낯익은 배우가 생의 깊이가 밴 주름진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같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간을 포말이 이는 이미지로 구현하기 위해 문 작가는 캔버스 위에 수차례 아크릴 물감을 바른 뒤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른 메스를 이용해 표면을 수도 없이 긁어냈다. 자연의 시간 너머 삶의 시간도 불러냈다. '삶, 시간-이미지' 연작마다 영화에서 낯익은 배우들이 보인다. 주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정면을 응시하는 그들에게서 온갖 희로애락을 겪은 노년의 달관이 느껴진다. 대중적인 그 인물들은 지금 여기 희망 어린 삶의 시간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문 작가는 "종전 작업이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향해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경은 미술기획자는 이 전시에 부친 평문에서 "그의 파도 시리즈 작품들은 역설적이게도 1000분의 1초로 포착되는 사진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적 에너지와 수 만년의 중첩된 시간들이 작가의 사유 체계 안에서 숙성되고 또 그것을 더듬고 있는 작가의 그리기의 흔적들은 회화적인 감각을 일깨운다"며 "이러한 과정들은 고도의 집중력과 인고의 노동을 수반하는 일종의 수행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문 작가는 중앙대와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두 차례 제주도미술대전 대상을 받았고 평택미술협회 소사벌미술대전 대상, 제주 초계청년미술상, 남도문화재단 전국청년작가미술공모전 선정작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 부문 최우수상 경력 등이 있다. 현재 제주대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한국미술협회 회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전시는 이달 18일부터 4월 16일까지 진행된다. 개막 시간은 첫날 오후 3시. 전시장 연락처 064)750-2543. 진선희기자